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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오는 날이었다. 무엇으로도 불리고자 하지 않는 소년병사는 처마 밑에서 비를 맞는 흰 들꽃을 발견했다. 후두둑 떨어지는 큰 방울이 꽃잎을 몇 번이나 때리는 데도 들꽃은 흐트러지는 법 없이 멀쩡하다. 소년병사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누군가 우산 대용으로 잠깐 쓰다 버린 것 같은 꺾인 연잎을 주워서 돌아왔다. 연잎을 들꽃 뒤에 세워 비를 막아주니 흰 꽃에는 금방 생기가 돌았다. 어차피 꽃은 낮은 지대에 있으니 머리 위의 비를 막아도 뿌리로 물을 삼키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꽃을 꺾어서 그분의 신단에 올려도 좋겠지만 오늘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선락국의 천지만물은 그분의 덕으로 살아가니, 이 꽃도 그분의 은혜를 들이마시게 두어도 좋으리라.

  

  그리고 오늘은 신단에 한번 더 들를 시간이 없기도 하고. 소년병사가 꽃에 미련이 남은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가, 다시금 총총 달려갔다. 밤이 깊었으니 서둘러 자야 아침 훈련 시간에도 늦지 않을 수 있었다. 제 막사로 기어들어간 소년병사가 잠들기 전, 단정히 서서 고개를 숙이고 기도했다. 당신이 평안하시길, 당신이 행복하시기를. 당신의 꿈이 나의 꿈이오니. 

  

  “……얘, 일어나렴. 아직 졸린가?”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소년병사는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어지간하면 제 잠을 깨우는 이가 누군지 경계부터 했겠지만, 이 목소리는 그가 깊이 인식하기도 전에 부드럽게 흩어지는 어떤 것이었다. 소년병사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본래 붕대로 머리를 둘둘 감고, 몸에는 지저분한 군복을 겨우 걸쳤던 그의 행색이 갑자기 달라져 있었다. 그는 부드러운 비단옷을 입고 있었고 온몸이 깨끗했다. 평소 가리고 있던 쪽의 눈에는 천 같은 것이 둘러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한다. 소년병사가 입술을 꾹 깨물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가 일어난 곳은, 잠들었던 막사가 아니라 어떤 좋은 침상 위였다. 그 곁에 누군가가 단정하게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병사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희게 빛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흰 옷자락, 아름다운 자태. 하늘거리는 천은 그 법력의 증명이며, 머리에 올린 금관과 비녀는 그 부귀의 상징이었다. 티 하나 없는 천은 온갖 귀한 색으로 빛났으며 금실과 은실로 귀한 수가 놓여 있기까지 했다. 금관의 장식은 잎 하나하나를 생생하게 세공한 꽃송이들이었고, 그 외에도 싱싱한 생화가 그 주변을 장식했다. 하나하나가 전부 기화요초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금 허리띠에는 검을 찰 수 있었다. 그가 가진 것이 훌륭한 보검일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소년병사가 알기로 이런 차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뿐이었다. 그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그분이 무릎을 꿇고 절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걸 알기에 납작 엎드리진 않았지만, 마음만 같아서는 고개를 조아리고 이것이 현실이 맞는지 헤아려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소년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태, 태자 전하……?”

  “하하, 일어났구나.”

  

  사련, 그의 빛, 그의 태양, 그의 유일한 신앙이 소년의 앞에 앉아 있었다. 소년병사는 자신이 침상에 누워 그를 맞이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그러나 동시에 제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사련은 또 왜 자신의 앞에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허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어여쁘다는 듯, 사련이 빙그레 웃었다.

  

  그의 미소는 천금이었다. 다정하고 온화한 빛이었으며, 상냥하고 부드럽기까지 했다. 게다가 사련은 소년이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도 더 아름다운 듯 보였다. 이렇게 지척에서 본 것이 너무 오랜만일 수도 있었다. 소년병사는 그의 자세한 모습을 기억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이분이 이렇게나 더욱 더 아름다운데. 그는 뺨이 발그스름했고, 살갗은 희면서도 단단했다. 그의 눈매에서는 말간 빛의 애정이 뚝뚝 묻어나왔다. 거기까지 조심스레 살핀 소년병사는 참지 못하고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전하, 어째서…….”

  “놀랐구나.”

  

  그러지 말고, 하며 사련이 소년병사의 손을 잡았다.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어서, 소년은 입을 꾹 다물었다. 꿈은 아닐까? 전하께서 내 꿈에 찾아와주신 게 아닐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병사는 태자 전하를 두고 이런 삿된 꿈을 꾸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었다. 감히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그가 입술을 자근자근 물었다. 하지만, 이것이 만약 꿈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사련이었다. 소년은 도저히 제 손을 잡아 끄는 사련을 뿌리칠 수 없었다. 제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는 사람처럼 흘긋흘긋 뒤를 돌아보는데, 어찌 그런단 말인가? 소년병사는 혼미한 정신이라도 바짝 차리려고 애를 썼다. 그는 어딘지 알 수 없는 귀한 집에 와 있는 모양이었다.

  

  사련은 그를 조심스럽게 붙들고 바깥으로 나섰다. 상이 있었고, 그 위에는 소담한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색을 알아볼 수 없는 탕국이 주 요리였고 나머지는 전병이나 과일 같은 그냥 먹는 것들이었다. 탕국의 색은 도저히 요리를 통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기묘한 빛깔이었고 냄새마저 기이했다. 소년병사는 감히 입을 열지 못하면서도 이 모든 상황을 하나하나 전부 이해하지 못해서 눈을 깜빡였다. 사련이 그를 데려와 상 앞에 앉혔다. 감히 태자전하와 한 상에 마주앉은 소년병사는 정말이지 어쩔 줄을 몰랐다. 

  

  “전하, 저는, 이게, 이럴 수 없습니다, 전하!”

  “아니, 아니, 괜찮아. 괜찮아! 나는, 그러니까…… 할 말이 있어서 너를 부른 거야.”

  

  두 손을 내젓는 사련은, 이전에 소년병사가 보아왔던 때보다 더욱 편하게 구는 모양새였다. 어쩌면 전하의 사가로 초대되기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전시인데? 당혹했던 소년병사는, 사련이 저를 부른 목적이 있다고 하고 나서야 안심했다. 전하는 사적일 때 더욱 다정하게 구시는 걸 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하면서. 사련이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상 위를 바라보았다. 그는 탕국을 흘금흘금 보면서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차려놓긴 했지만 네가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이건 내가 만든 건데…….”

  “네? 전하께서요?”

  “으응, 그런데 맛이 없을 거야. 도저히 못 먹겠으면 이 전병이나 사과를 먹도록 해. 귤도 맛있더라.”

  

  사실, 사련의 요리 솜씨는 그다지 좋지 못한 수준을 넘어선 무언가였다. 귀한 태자로 자라난 그가 부엌에는 가까이 가 보았으랴, 국자 한번 쥐어 보았으랴? 때문에 이런 기괴한 몰골의 음식이 나왔다는 것에는 전혀 이상한 바가 없었다. 사련이 멋쩍게 제 앞에 놓인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정말. 소년을 대접하기 위해 나름대로 정성을 다한다고 한 것인데, 과했나? 이건 좀 짤 지도 몰라. 아니면 쓰던지. 

  

  그러나 사련의 자기반성이 얼마나 깊던지 간에, 소년병사는 황송해서 어쩔 줄 몰라하며 머뭇머뭇 수저를 쥐었다. 자신을 위해 태자 전하께서 손수 요리까지 하셨다는데 이것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마음이 애초에 생겨나지조차 않았다. 게다가, 본래 곧잘 굶주리곤 했던 소년은 무엇이건 잘 먹었다. 얼마나 잘 만들었고 못 만들었고는 딱히 신경쓰이지 않았다. 게다가 사련의 요리이지 않은가. 어떤 것이든 그의 혀 위에서 녹아내릴 것이고, 어떤 맛이건 그가 평생 기억하고 간직할 것이었다. 소년병사가 감사히 먹겠습니다, 진지하게 인사하며 숟가락을 움직였다.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사련의 마음과는 달리, 소년병사는 곧잘 탕국을 퍼 먹었다. 안에 밥을 넣은 건지 누룽지를 넣은 건지 모르겠지만 씹히는 것도 있어서 속도 든든했다. 한입 두입 먹는 소년병사는 사련이 직접 ‘맛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던 것에 비해서 상당히 괜찮은 요리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그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씌인 무언가일까? 아니, 하지만 정말로 괜찮은걸. 사련은, 그가 지체하지도 않고 냠냠 먹는 것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먹을 만 해?”

  “예. 약간 진하긴 하지만, ‘맛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걸요. 좋아요.”

  “그래? 다행이다.”

  

  과연 했던 말이 헛소리는 아니었는지, 소년병사는 탕국을 깨끗하게 비웠다. 너는 너구나. 사련이 물잔을 밀어주었다. 소년이 식사를 마치고 조심조심 사과 조각까지 두어개 먹는 걸 보고 나서야 사련은 환하게 웃었다. 그는, 드디어 사련이 본론을 꺼내려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은 소년병사는 익숙하지 않은 비단옷자락을 꼭 쥐고 사련을 바라보았다.

  

  “오늘 너를 부른 것은…….”

  “네, 전하.”

  “네가, 내게 선물을 주고 싶을 것 같아서야.”

  

  선물을? 소년병사가 눈을 깜빡였다. 사련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민망하다는 듯 뺨을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 웃음마저도 살풋한 것이,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소년병사는 순간 그 미소짓는 입매에 혼을 빼앗길 뻔 했다가 자신을 다잡았다. 정말이지, 사련의 앞에서 자신을 찾는 일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를 위해 살겠다고, 그를 위한 삶을 살겠다고 맹세했으면서 한심한 꼴을 보이다니. 소년병사가 등을 꼿꼿하게 폈다. 사련의 미소가 그의 입가에서 한 바퀴 굴렀다. 소년이 긴장하는 모양새가 너무도 귀여워 그의 면구함이 한 꺼풀 빠져나간 듯 했다. 사련이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내게 공물을 올리고, 꽃을 놓아주었지?”

  “아, 알고 계셨군요…….”

  “그래서, 그것에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아, 당신이 나를 알고 있었구나. 소년병사의 시선이 흔들렸다. 감히 보답받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는 팔천 궁관을 가진 선락국의 태자전하였다. 신무대제 다음 가는 훌륭한 무신이었고 이제껏 그가 해내지 못한 일이 없었다. 선락국에는 그의 신도가 구름처럼 많았기 때문에 소년은 사련이 자신을 알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어린 저를 구한 적 있고, 기도하는 제 앞에 나타난 적 있으며, 가깝고도 부끄럽게 한 차례 만난 적 있다고 해도 그랬다. 소년은 이런 쪽으로는 감히 절대로 확신을 못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당신이 나를 알고 계셨군요. 소년병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낯색을 가만히 살피던 사련이 결국 털어놓았다.

  

  “그리고 오늘은 내 생일이거든. 그래서 네가 만약 내게 선물을 주고 싶다면…….”

  “드리고 싶어요!”

  

  무어라 생각하기도 전에 소년병사가 외쳤다. 말하고 나서 화들짝 놀란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저 자신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서는 열기가 흘렀고 기쁨이 넘쳤다. 그것은 얼마나 값지게 빛나는 것인가. 사련이 홀린 듯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감히 자신의 신앙을 판단하거나 재단하지 않는, 그럴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소년병사는 사련이 저를 어떤 눈으로 보건, 그저 마주할 뿐이었다. 당신이 무엇을 하건, 그것이 어떤 길이건, 당신의 길이 나의 길이고 당신이 가는 곳이 내가 갈 곳이라는 양. 무어라 생각하기도 전에, 부지불식간에 사련이 조용히 말했다.

  

  “난 이미 네가 준 것에 감사해.”

  “태자전하.”

  “너는 이해하기 어려울 지도 모르지만, ‘네게 선물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어떤 선물이거든. 나는 이미 네게 감사하고 있어.”

  

  그러면서 사련은 가만히 웃었다. 소년병사는 그의 웃음에서 이상한 것을 알아챘다. 그는 마치 더 오랜 시간을, 더 오랜 세월을 보낸 것처럼 고요하고 잔잔했다. 며칠 전에 먼 발치에서 보았던 사련은 이런 사람은 아니었는데. 전시의 그는 피로해했고, 애쓰고 있었으며, 혼란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소년병사는 제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에 매일 밤 괴로워하며 기원을 올릴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정말로 나의 꿈인걸까? 만일 그렇다고 해도, 이것이 현실이 아니고 당신은 그저 내 꿈에 찾아온 것일 뿐이라고 해도, 소년병사가 그에게 돌려줄 수 있는 답은 오로지 한 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입술이, 자신의 혀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그의 영혼이 속삭였다.

  

  “당신을 위해 살게 된 것은, 저의 오롯한 영광입니다. 제 삶의 유일한 의미이며 기쁨이고 희망이에요. 감사 인사는 거두어주십시오, 전하.”

  

  그의 진지하고도 공손한 답에, 사련이 웃었다. 소년병사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역시, 그는 어떤 근심도 없이 편히 웃었으면 했다. 찰나일 뿐이겠지만 제가 그런 웃음을 끌어냈다는 것이 기뻤다. 그가 영영 웃었으면 했다. 사련이, 상에 턱을 괴고 웃음을 터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고 있어.”

  “알고 계신가요?”

  “그래, 알고 있어.”

  

  당신은 무엇이든 아시는군요. 소년병사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저도 아시고요. 그가 조심스럽게 손을 모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선물을 드리고 싶어요.”

  “무엇을 주고 싶어?”

  “하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들꽃뿐인걸요.”

  “아니야, 내게 너를 주었잖아.”

  “그건 들꽃보다도 보잘 것 없어요, 전하.”

  

  잠시 생각한 사련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밤하늘에 흐르는 강물같았다. 소년병사는 그의 모든 말씀 하나하나를 신앙으로 받드는 사람이었다. 나의 사랑이고, 나의 신앙이신 당신. 그의 신이 가만히 그를 끌어올렸다.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말하진 않을게. 너는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네가 얼마나 크든 작든, 너라는 건, 네게 있는 전부잖아. 그걸 내게 주었으니, 얼마나 큰 것이겠니? 너의 세상 전부를 내게 준 것인데. 나는 다 받았어. 내가 받았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전하?”

  “그럼.”

  “그러면, 당신께 다시 한번 저를 드릴게요. 저의 삶은 이미 전하께 바쳤지만, 죽고 나서도, 그 이후에도, 제 세상을 전부 드릴게요.”

  “…….”

  “저는 당신을 위해 살 것이고, 당신을 위해 죽을 테고, 당신을 위해 다시 살아날 수도 있을 거예요.”

  

  사련은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이 얼마나 깊은 진심인지. 그가, 제가 한 약속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 사람인지. 

  

  “제 세상을 드릴게요, 전하. 생일 축하드려요.”

  

  소년병사를 가만히 바라보던 사련이, 상 위에 곱게 놓인 그의 손을 붙잡았다. 전하? 하고 부르는 것에도 아랑곳않고, 그 손을 붙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늘하늘한 선락태자의 의복이 사락사락 흩날린다. 소년병사의 앞에 사련이 서 있었다. 소년병사는 아직, 그의 얼굴이 무슨 표정인지 읽을 수 없었다. 그의 발긋한 뺨이, 기쁜 듯 둥근 눈가가, 다정한 입술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지 감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사련 자신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소년의 손은 이대로 자라면 훤칠해질 것을 암시하듯 단단하고 꽤나 컸다. 제게 조금도 저항하지 않는 그것을 깍지 껴 쥐고는, 사련이 고개를 숙였다. 소년의 붕대 두른 이마에 입을 맞춘다. 마치 신이 신도에게 축복을 내리는 것처럼. 그리고 콧잔등에, 다시 입술에. 신이 내리는 것 같던 입맞춤이 그 아래서 무엇으로 바뀌었는지 소년은 아직 알지 못하리라. 사련이 빈 손으로 소년병사의 뺨을 조심스레 쥐었다. 그는 의외로, 동요하기보단 그저 사련을 줄곧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 그의 입술, 모든 것 하나하나를 조금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뱃속이 간질간질 부푼다. 참을 수 없어, 사련이 다시 고개를 내렸다. 나를 위해 두 번 죽고도 또 한 번 내게 삶과 죽음을 모두 바친 너를 안다. 입술을 벌리고 숨을 끌어당겨 제 것으로 삼는다. 약간 차가운 살결에는 제 것을 맞대어 온기를 내어주었다. 내가, 그것을 받았음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숨과 함께 혼이 옮겨가는 듯한 입맞춤 가운데, 어느 순간에 무언가 변했다. 사련이 깍지 끼어 잡고 있던 그 손이 찰나에 자라나고, 단단해지고, 그를 지켜줄 수 있을 만큼 강인해져서는 사련을 꽉 쥐었다. 입 맞추는 입술이 휘어 웃는다. 사련이 눈을 떴다.

  

  그의 앞에 앉아 있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다시 화성이었다.

  

  사련을 지키고 싶어했던 그가, 사련을 지킬 수 있을 그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당신께 자신을 바치겠노라고, 제 세상을 바치겠노라고 맹세했던 그가. 때문에 제 세상에 사련에게 줄 모든 것을 밀어넣으려 끝없이 노력했던 그의 사랑이 있었다. 붉은 비단 옷을 입은 화성이 사련의 볼에 입을 맞추고 웃었다. 

  

  “형.”

  “삼랑.”

  “마음에 들었어?”

  

  말하자면, 원리는 간단하다. 옛적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기억 먹는 것의 힘을 빌려 화성을 소년병사 시절로 되돌린 것이었다. 사전에 그러자 하고 이야기를 마쳐 화성은 자신의 옷과 몸까지도 바꾸어두었다. 그 시절의 화성이, 어렸던 소년병사가 이상을 느끼지 못하도록. 그러니 사련은 진정으로 그때의 화성과 만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시간을 돌려 그때의 그를 알아주러 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시절의 소년은 청년이 되어 여기에 있으니까. 사련이 태자 시절처럼 화려한 옷깃을 매만지며 화성에게 기대듯 섰다. 자연스레 그의 허리를 받쳐 쥔 화성이 사련의 입술에 쪽쪽 입맞춤을 퍼부었다. 간지럽다는 듯 한바탕 웃은 사련이 웃음기 가득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내게 주고 싶어했던 걸, 받아주고 싶었어.”

  “응.”

  “삼랑은 어릴 때도 삼랑이구나. 멋있고 다정해.”

  “흐음, 보잘 것 없는 시절인걸.”

  “삼랑,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 하면 어떡해?”

  

  하하, 화성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여전히 제 무력했던 시절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사련은 그때마저 사랑했다. 그 시절에도 그는 사련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는걸. 세상 모든 사람이 등을 돌려도, 하늘의 신관들도, 땅의 백성들도 그를 외면하더라도, 그래서 결국 그가 사련의 세상에서 마지막 한 사람이 된다고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서. 그토록 절망스럽고 괴로웠던 시절에마저도 그는 혼자가 아니었음을 알았다. 언제나 그에게는 한 사람이 있었다. 늦게 알게 되었지만, 충분하다. 이제는 이렇게, 유일한 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사련이 화성의 뺨을 쥐고 입을 맞추며 웃음을 터뜨렸다. 영원히, 영원히 제게 자신의 세상을 모두 선물할 단 한 사람. 두 손에 그의 선물을 안았다. 화성이 사련의 손에 뺨을 뉘이며 씩 웃었다. 

  

  “마음에 드시나요, 전하?”

  “내 생에 최고의 선물이야. 앞으로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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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존  - 삼생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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