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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련합작 본론페이지 위.png

"당신에겐 팔지 않는다니까."

 

  떠들썩한 시장가 안에서 퍼지는 한 남성의 우렁찬 목소리는 언제나의 일이었던 듯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 했다. 한눈에 보아도 값비싼 것으로 치장한 높은 건물의 객잔 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우선, 손님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정교하게 수놓인 고급 비단옷을 입은 이들로, 그들은 때 이른 식사를 하고 있었다. 또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는 방금 전 큰소리를 지르던 객잔 주인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남성과, 그에 비해선 왜소하나 나름의 체격을 가진 초라한 옷을 입은 남성이 있다. 왜소한 체격을 가진 남성의 옷차림을 흘겨 본 다른 손님들은 잠깐의 관심마저 치우곤 자신의 일행과의 담소를 이어나갔다. 이 객잔에서 이런 풍경은 다소 뻔한 편이었다. 어차피 구걸을 하러 왔거나 -그런 것 치곤 멀쩡한 생김새지만-, 돈을 모아 좋은 한 끼를 먹어보려는 범인일 것이다. 그런 이들은 돈만 있으면 이런 곳에서도 식사 할 수 있을 것이란 착각을 가지고 있어 가게의 품격을 유지해야하는 주인을 곤란케 만들었다. 호화로운 손님들은 주인장이 어서 이 시끄러운 풍경을 치워주길 바랄 뿐이었다.

  왜소한 사내, 사련은 곤란함에 어쩌지 못한 채 그저 눈썹을 올려 웃을 수밖에 없었다. 800년을 살았으니 이러한 일도 한두번 겪은 게 아니기에 이 덩치 좋은 주인장이 이리 행동하는 까닭이 자신의 옷차림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 것은 전혀 득이 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지금 입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생김새인 3벌의 옷만을 가지고 있으니 알고 있다 하여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련은 먹을 것을 귀이 여기긴 하나 그 종류를 가리는 것이 아니니 지금까진 한 객잔에서 쫓겨난다면 다른 객잔으로 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사련은 지난달 화성의 생일에 그에게 근사한 식사를 대접해주기로 약속 했었다. 그 후로 화성 몰래 음식을 만들어봤으나, 늘 '멀쩡한'맛이 나오는 것엔 성공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언제나 맛을 봐주던 청현이 이젠 부르면 자는척하기까지 한다. 결국 방향을 '직접 만든 음식'에서 '직접 고른 식당'으로 바꿔야만했다. 사련은 여전히 제 앞을 가로막은 주인장을 바라보곤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였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모정이 준 옷을 한 벌쯤은 가지고 있을걸. '그러게 차림새에 신경 쓰라고 거듭 말하지 않았습니까.' 벌써부터 모정의 꾸지람이 귀에 들려오는 듯하다.

  

"그러게 차림새에 신경 쓰라고 거듭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벅저벅 들려오는 절제된 발걸음 소리가 아니었더라면 사련은 이 익숙한 목소리를 환청이라 여길 뻔했다. 사련은 고개를 살짝 돌려 어느새 제 옆에 선 모정을 바라보았다. 좁은 소매 폭의 단정하게 차려입은 옷은 은은한 광택이 나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였으며, 높게 묶은 머리카락을 장식한 단 하나의 장신구는 정갈한 미가 있으니 이 또한 고급스러워 보였다. 왼쪽 허리에 동여매진 칼집이 없었더라면 부잣집의 잘생긴 한량으로 보일 법했다. 사련은 그를 부르러 입을 벌렸으나, 소리를 내지 못하고 멈칫하였다. 어딜 가도 눈에 띄는 모정은 이번에도 많은 눈길을 끌었고, 또한 그의 이름은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유명했다. 그러하니 이토록 사람이 많은 곳에서 그를 진명으로 부른다면 그가 신관임을 들키진 않는다하더라도 그의 극성 신도로 오해받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변의 이목을 신경 쓰는 모정이 그런 상황을 원하진 않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사련은 벌린 입술 사이로 다른 소리를 꺼내었다.

  

"오랜만이야, 부요."

"그리 놀리니 재밌습니까."

  

  이게 아닌가보네... 사련은 하하 짧은 웃음소리를 내며 상황을 모면하려 하였다. 모정은 그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짧게 콧소리를 내뱉는 것만으로 넘어가주었다. 이 상황에서 가장 곤란해 진건 어느새 허리를 굽히며 저자세를 취하고 있는 큰 덩치의 주인장 일 것이다. 고급스런 실내장식, 고급스런 음식, 고급스런 손님들까지. 돈 많은 부잣집 손님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모든 것을 신경써왔고 가게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는 평범한 손님들을 내쫓기까지 해왔다. 지금껏 실수는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 실수를 바로 지금 해버린 모양이었다. 이 품격을 온몸에 두른 공자가 높임말을 쓰는 이 낡은...아니 왜소한 공자는 적어도 그와 동등한,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이지 않겠는가. 도사인가? 한손가락에 든다하는 도사들도 세속에 물들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금을 멀리한다는 말을 얼핏 들은 것도 같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 사람이라면 자고로 자신의 가치가 뛰어난 만큼 좋은 대우를 받고 싶어 하는 게 당연했다. 굳이 가난한 옷차림을 할 이유가 무엇 있냔 말이다. 주인장이 저 혼자 사념에 휩쌓이는 동안 모정은 사련에게 손짓을 하며 가게 안의 전망 좋은 2층 자리로 발걸음 하였다. 사련은 넋이 나간 주인장을 뒤로하고 가게의 점소이를 불러 2인분의 메뉴를 주문한 후에야 모정을 따라 계단을 밞아 올랐다.

 주인장이 신경을 쓴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러한 곳인지. 음식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모정과 사련의 앞에 차례대로 한 접시 한 접시 놓여 질 때마다 모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마디도 없이 싸늘한 모정의 표정에 겁먹은 점소이가 모든 음식을 내려놓고 서둘러 자리를 떠서야 모정은 참았던 말을 꺼내놓았다.

  

"아직도 식사를 합니까?"

 "꼭 필요하진 않아. 이번엔... 삼랑에게 식사대접을 하고 싶어서 맛있는 가게를 찾고 있었어."

  

  모정은 연인의 이름을 거론하며 수줍은 표정을 짓는 800년 친구를 보고 있자니 속 안쪽에서부터 매스꺼움이 올라왔다. 그렇게 좋으면 아주 둘이 살지 그러십니까? 모정은 자신의 불쾌함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사련은 대놓고 빈정거리는 모정에게 차마 이미 그러고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지 못 했다. 사련은 나쁜 말을 하는 성격은 못되지만, 동시에 거짓말을 하는 성격도 못되었기에 이번에도 그저 하하 웃으며 넘길 뿐이었다. 모정의 빈정거림이 끝났다 싶어 사련은 드디어 이곳에 온 목적인 음식맛을 보기 위해 젓가락을 집어 썰어진 고기를 한 점 들어 올렸으나, 그것이 입에도 채 가지 못해서 모정의 목소리에 의해 막혔다. 꼴을 보아하니 역시나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준비? 사련은 무엇 하나 짐작가지 않는다는 것을 허위 없이 표정으로 드러내었다. 모정은 만난 지 얼마 안됐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세 번째로 웃음으로 만회하려는 사련을 보며 이번에도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 지난해 그 난리 끝에 올해부턴 사련 당신이 올라오기로 한 걸 벌써 잊었습니까? "

  

  ‘지난해’ 모정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로 사련은 그제야 작년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사련은 현재 정든 보제마을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해 살고 있는데, 그가 보제마을을 떠나야 했던 이유가 바로 일 년 전 오늘 있었던 사건 때문이었다. 일주기마다 돌아오는 이 날은 사련이 첫 번째 비승을 해 선락태자라는 신명을 얻은 날을 기념하는 탄신(誕新)절이다.

  현재 상천정의 제일 무신은 공석이다. 적어도 사련의 생각은 그러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관이 마치 군사혁명의 역사가 지난 것처럼 군오를 쓰러트린 사련을 빈자리의 주인으로 여기는 것 또한 모른 척 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많은 신관들이 아닌척하며 자신의 입지를 위해 새로운 권력자의 눈에 들고 싶어 한다는 것을 모르긴 힘들었다. 현재의 상천정이 사련의 지기들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기까지 하니 그러한 양상은 날이 갈수록 고조되어만 갔다. 800년 전 태자시절의 사련은 그러한 것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고, 선락국이 멸망한 이후로는 그럴 일이 없었으니, 800년이란 세월을 살았음에도 사련은 여전히 정치적인 움직임에는 문외한이라 그저 피한다는 선택밖에 할 수 없었다. 그로인해 생긴 일이 작년 탄신절이었다.

  사련의 비승은 다소 오래되어 그때 당시의 신관 중 현재까지 남은 이의 수가 적었으며, 오랜 시간동안 역신으로 여겨져 기피의 대상이 되었던 탓에 그의 탄신절을 알고 있는 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또한, 사련이 상천정의 중요한 인물로 떠오른 이후론 그것을 아는 이들은 정보를 나누는 대신 저 혼자 알며 입신양명을 위한 길로 이용했다. 그들은 매 탄신절마다 보제마을로 와 선물을 두고 갔다. 목적이 투명한 선물이었으나, 준비한 선물을 받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고, 어찌되었던 자신을 위해 준비한 선물은 기분이 좋았기에 소소한 즐거움이 되곤 했었다. 허나 작년은, 어찌된 영문인지 대부분의 상천정 신관이 그의 탄신일을 알고 저마다 크고 작은 선물을 챙겨 보제관 앞을 다투었다. 이제껏 한둘의 사람이 드나드는 것은 개인적인 친분 또는 선락태자의 신도로 비춰질 수 있었으나 그 수가 수십, 그것도 하나같이 값비싼 옷을 입고 값비싼 선물을 품에 들었으니 이목을 받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보제마을 사람들은 친절하여 사련을 의심하기보단 그를 걱정해주었다. 사련은 더 이상 그들에게 거짓말 하고 싶지 않았기에 결국 그곳을 떠났다.

  몇 안 되는 짐을 옮기는 것을 도와주던 풍신과 모정에게 다음해부턴 차라리 자신이 올라가 보내겠다고 했던 것이 이제야 생각났다. 탄신절에 상천정에 오르는 것을 잊었다고 하기 보단 오늘이 자신의 탄신절임을 잊은 까닭이었다. 사련은 여전히 자신의 젓가락 사이에 잡혀 공중을 방황중인 고기 한 점을 끝내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몇 번 오물거리니 육즙이 입안에 풍겨 감미로웠다. 이 집 정말 괜찮네. 삼랑이랑 이곳으로 오면 되겠어. 사련은 한 점 외엔 전혀 손대지 않은 남은 음식을 바라보았다. 미련이 남았으나, 이것을 먹는 사이 수십의 상천정 신관이 내려오는 것보단 나았다. 사련은 얌전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젠 됐어. 올라가자."

"그에겐 말하지 않나요?"

"응, 삼랑은 당분간 바쁘다고 했어. 통령도 있으니 괜찮아. "

 

  모정은 납득한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사련은 자리에 일어나 금화 한 닢을 두고 계단을 내려가는 모정을 바라보았다. 풍신과 모정은 삼랑을 싫어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와 자신의 관계를 부정하진 않았다. 오랜 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지기들이 인정해 준 다는 것은 생각보다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모정이 뒤돌아보며 눈빛으로 재촉하는 모양에 사련은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

 

  상천정에 올라온 사련은 자신의 앞에 펼쳐진 광경에 의문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한번 다시 세워진 상천정은 군오가 있던 시절에서 크게 달라짐이 없었다. 심지어 신전들의 위치마저 같았다. 그런 상천정에서 눈에 띄게 달라진 곳을 찾자면, 지금 사련이 보고 있는 바로 이 앞일 것이다. 예전의 이곳은 정갈한 백색의 신전이 들어서 있었다. 바로 신무전이. 지금 이 곳에 서 있는 신전은 작은 흰색의 꽃들이 만개하여 앞을 가득 메웠으니 수수해보이면서 동시에 화려했다. 내부는 밝은 불이 가득했으며, 눈길을 돌리는 족족 하얀 꽃잎이 그를 맞이했다. 사련이 알기론 상천정에 이런 특색을 가진 신전의 주인은 단 한 명뿐이었다. 선락태자, 바로 사련 자신이다. 사련은 만신굴의 석상이 도망쳐 온 이후 상천정에 오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이 태자전도 사련이 세운 것이 아니다. 사련이 신무전 대신 세워져있는 태자전을 보며 얼떨떨함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 모정은 어느새 사련보다 앞서 태자전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뻔한 표정 짓지 마세요. 제가 지었습니다. "

  

  사련의 의문스런 표정이 태자전에서 자신에게로 옮겨오자 모정은 설명은 덧붙였다. 신무전이 있을 때엔 상천정의 크고 작은 일들을 신무전에 모여 의견을 나누곤 했었다. 그러다 신무전이 사라지니 의견을 논할 장소 선정에 문제가 생겼다. 풍신과 모정의 사이가 나쁜 것처럼 다른 신관들도 서로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해 특정한 신의 신전에서 모임을 갖고자 하면 꼭 반대의 의견이 나왔다. 그것은 싸움으로 번지기도 하였으니 일은 일대로 쌓이고 상천정의 분위기도 흐려져만 갔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신전을 지을 생각조차 없는 사련을 대신해 모정이 자신의 공덕으로 그의 신전을 쌓아 올리게 된 것이다. 사련은 모정을 따라 태자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그가 만든 자신의 신전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모정이 꼼꼼한 건 알았지만, 정말 신경 많이 썼구나. 신전 내부는 세부 조각마저 사련의 취향을 담아내었다. 이런 신전을 세울 수 있는 건 화성을 제외하고는 모정이 유일할 것이다. 사련과 모정은 태자전의 중심을 가로지르며 대전으로 향했다. 사련은 대전을 보며 다시금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이건..... 장식이 너무 과한 것 같은데..." 

"당연히 오늘만입니다. 하계의 사람들처럼 망각이라도 하는 겁니까. 당신이 막 비승했을 때도 몇 번 봤잖습니까."

  

  사련이 비승한 해에 화려하게 장신된 신무전의 대전을 본적이 있었다. 그 때 신무전을 장식한 것은 무수히 많은 검들이었다. 사련은 주변 둘러보았다. 지금 이곳을 장식하고 있는 것은 화려하게 피어오른 꽃들이었다. 신무대제의 상징이 검이었다면 화관무신의 상징은 꽃이라 여긴 터이다. 상천정 가장 높은 곳을 자리한 신전부터, 탄신일을 기념하는 화려한 장식까지. 이 모든 게 신무대제를 답습하는 듯 해 사련은 도저히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사련의 거북함을 잠재운 것은 모정의 짧은 콧바람 소리였다.

 

"당신이 이런 걸 바라지 않는 다는 것은 상천정 모두가 알겁니다. 하지만 이미 너무 오랫동안 이어져 왔습니다. 갑자기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어요. 당분간은 그를 대신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당신뿐이죠. 다른 사람은 안됩니다. 제 2의 군오가 되지 않을 사람이 맡아야 합니다. "

 

  신관은 사람이 하늘에 오른 존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여 사람이 가지는 위험은 신관 또한 가졌다. 사련은 오랜만에 모정과 긴 대화를 나누었다. 먼저 신에 오른 것은 사련이었지만, 오랜 시간 상천정에 머문 것은 모정이었으니 그들 중 모정만큼 사리에 밝은이도 없었다. 어느 신관이 욕심이 많으며, 어느 신관들의 사이가 나쁜 것인지. 사련은 이제껏 알지 못 했던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다른 신관들이 대전으로 모여든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손에 든 선물들은 하나같이 크고 화려한 것들이라 사련은 저 선물들이 지금 머무는 좁은 집에 들어차지 않는 다는 것에 안도하였다. 이곳에 두고 가자. 이곳도 내 집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서운해 하지 않을 거야. 사련은 제 양쪽에 쌓여가는 것들을 보며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사련의 자리는 대전 중앙 끝에 자리해 계단으로 높게 올라가 있었다. 사련은 부담스러웠으나 탄신절의 주인공이 어중간한 자리에 앉을 순 없기에 순순히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좀 더 높은 곳에서 바라본 대전의 경치는 더욱 대단하였다. 꽃들은 시기 적절하게 피어올라 화려했으며, 평상을 채운 음식들은 하계의 온갖 산해진미를 모조리 모아둔 듯하였다. 술병에서 솟아오른 향은 감미로워 냄새만으로 미각을 자극하였다. 자신을 위해 준비한 연회임이 분명한데도 이렇게 높은 곳에 앉아 바라만 보자니 마치 자신과는 분리된 그림의 장면을 보는 듯 했다. 어색하다. 내가 이 연회의 주인공인데 이토록 불편하다니, 이건 주객전도가 아닌가. 어찌되었던 이 연회는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함이니 내가 이리 불편해 한다면 연회를 준비한 사람에 대한 도리가 아닐 것이다. 음 그렇고말고. 사련은 마침내 자신의 술잔을 들고 높은 계단은 차례대로 밞아 내려갔다. 그가 하나의 계단을 내려올 때마다 수 명의 신관들이 입을 멈추곤 저를 바라보았다. 사련이 다른 신관들과 같은 고도에 섰을 땐 모두가 이 연회의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단 밑에서 가장 가까운 양 옆에 자리하고 있던 풍신과 모정은 자리에서 일어나있었다. 모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팔짱을 끼곤 시선을 돌려버렸다. 풍신은, 할 말이 많은 듯한 표정으로 사련을 바라보았다. 사련이 그를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난 여기가 좋. 사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풍신의 손이 사련의 앞을 스쳐지나갔다. 풍신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사련은 말을 끝까지 뱉지 못했다. 풍신의 손이 지나가니, 자신의 손은 허전해 졌다. 대신 풍신의 손 위에는 익숙한 술잔이 들려졌다. 사련은 '선락태자 사련'에게 익숙한 풍신은 자신이 내려온 것에 충언을 할 것이라 여겼지, 설마 자신의 술잔을 가져가 버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사련이 자신의 것이었던 술잔을 빤히 바라보자 풍신은 아예 술잔에 든 술을 털어 마셔버렸다.

  

"지금부터 술판이 벌어질 것 이온데, 전하께서는 단 한잔도 드셔선 안 됩니다. "

  

  단 한잔도! 사련은 애초에 술을 마실 생각이 없었건만, 풍신은 성벽을 지키는 척당불기의 장군마냥 단호하니 사련은 그 기백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련은 가볍게 주변을 흩었다. 애초에 인원수에 맞춰 준비된 터라 역시나 비어 있는 평상은 없었다. 그럼 어때. 나뭇잎을 지붕삼아 잠을 청하던 사련인데, 심지어 이곳은 지붕도 튼튼한 태자전 이었다. 자리가 특별히 정해져 있겠는가, 그가 앉은 곳이 바로 자리이다. 사련은 계단 바로 아래의 평상도 무엇도 없는 맨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련은 더 이상 배고픔을 느낄 일이 없었고,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의 삼랑과 함께 먹으면 되는 일이니 아쉬울 게 전혀 없었다. 사련은 그렇게 가장 초졸한 자리에 앉아서야 이 연회의 주인공으로서 입을 열었다.

 

"이렇게 제 탄신절을 축하해 주시기 위해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민망하게도 제가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모쪼록 즐기다 가시길 바랍니다."

  

  사련의 발걸음과 함께 조용해진 대전은 사련의 말이 끝남으로서 다시 활기를 찾았다. 한두명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뢰사대인의 번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들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어디선가 붉은 잔을 꺼내와 술을 따르더니 옆 사람에게, 그리고 또 옆 사람에게 술잔을 돌렸다. 풍신과 모정 사이에 앉게 된 사련은 모정에게 잔을 받으면 모정의 손가락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풍신이 가져가 버렸고, 풍신에게서 잔을 받으면 모정이 잽싸게 가져가 버린 탓에 술잔 바닥은커녕 잔에 새겨진 문구조차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다. 더 이상 수십만 공덕을 내며 극을 내릴 사람이 없던 까닭에 한 번의 번개가 내려쳐질 때마다 한 번의 극이 올랐다. 극은 여느 때처럼 신들의 사랑을 다루기도 하였고, 권선징악의 스토리를 담기도 하였다. 그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홍의귀왕과 넝마선인의 이야기가 퍼진 탓인지 요괴와 신의 금단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드문드문 펼쳐졌고, 그때마다 그 신관은 뒷목을 잡으며 뒤로 넘어갈 뻔했다. 허나 이들 중 누구도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보지 않았다. 그저 장난칠 소재를 얻은 것처럼 웃음소리가 더해질 뿐이었다. 얼핏 본다면, 더없이 평화로웠다. 물론 평화롭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련은 알고 있었다. 이 무대 위의 극들이 재밌는 이유는, 마음 편히 장난으로 넘길 수 있 것들만이 올라온 까닭은, 수사대인이, 풍사대인이, 그리고 군오가 이 자리에 없어 술잔에 당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늘에 오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하늘의 사람이 밑으로 내려가는 것은 더없이 쉬운 일이다. 그렇듯 이야기도 다를 바 없다. 인계의 수천만의 기원 중 신관의 귀에 닿아 이루어지는 것은 많아봐야 수십이니, 땅의 이야기가 하늘에 오르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에 반해 고작 수십인 상천정 신관들의 이야기는 땅으로 내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수천만 사이에 퍼져나가니 이는 너무나 쉬운 일이다. 사람의 무사기원을 들어주던 신관이 사실은 다른 이의 명격을 훔쳤단 것을, 역병을 불러일으키는 대해라는 것은, 이미 수천만의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신관들조차 두려워하던 것을 수백의 집 잃은 사람들이 해낸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과연 그들이 예전만큼 신관을 믿을 수 있을까. 사련은 수 백년을 사람들 사이에서 보내왔으나, 결국 그도 사람이 아니니 감히 그들의 마음을 예지할 수 없었다. 

  오오- 이제 슬슬 올라 오려나 봅니다. 누군가의 말을 시작으로 돌아가던 잔이 멈췄다. 그들의 발아래에는 인계의 하늘이 비춰졌다. 어느새 어두워진 밤하늘에는 하나의 작은 불빛이 천천히 하늘로 올랐다. 만개한 흰 꽃이 수놓인 장명등은 분명하게 선락태자께 올린 장명등이었다. 삼천개의 장명등은 참으로 장관이었소. 그렇지. 그렇지. 역시 태자전하야. 순수한 감탄과 그것들 사이에 섞인 은밀한 감언이설의 소리가 잔잔히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장명등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은 까닭이었다. 개개인의 의문이 소리가 되어 술렁임으로 발전하기 시작할 때야 두 번째 장명등이 올랐다. 마찬가지로 수 천 개의 장명등이 떠오르는 건 볼 수 없었다. 세 번째의 엉성하게 수놓인 등이 오른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불빛은 찾아 볼 수 없었다. 혈우탐화가 돈이 떨어진 건가. 그렇다면 좋을걸 세. 옛끼, 이 사람아 태자전하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어! 의문점은 삼천등불의 장관을 보여주었던 혈우탐화, 화성에게 쏠렸다. 이건 삼랑이 올린 게 아니야. 사련은 연회를 주도하고 있던 뢰사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뢰사대인, 이 장명등은 어디서 올라온 것입니까?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수천의 장명등을 기다리며 수를 셀 준비를 하던 뢰사가 한 박자 늦게 사련의 말에 반응하였다. 그것이. 북쪽에서 올라온 것은 태하관, 서쪽에서 올라온 것은 하남관, 서남에서 올라온 것은 적안관이라 적혀 있습니다. 모두 처음 듣는 이름들이었다. 사련은 굳이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 

 

"모두 처음 듣는 신전입니다."

  

  수년전, 세 번째 비승을 하고 이와 같은 연회에서 비슷한 말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땐, 유일한 신자인 화성을 만났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련이 생각을 다 하기도 전에 그의 머릿속에는 높은 톤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넝마선인님, 넝마선인님. 제 남편이 무사히 수도에 도착할 수 있도록 복을 내려주세요.'
'태자전하, 곧 태어날 아이에게 복을 내려주세요.'
'선락태자께 이 꽃을 바칩니다.'

 

  젊은 남성의 목소리, 늙은이의 목소리, 어린아이의 목소리. 다양한 목소리가 사련의 귓가를 스쳐지나갔다. 사련은 들려오는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더 이상 아무런 불빛도 떠오르지 않는 하계의 하늘을 그저 멍하니 보는 듯 한 사련의 모습에 다른 이들은 쉽사리 말을 건네지 못하였다. 그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초라한 세 개의 장명등에 수십의 기원이 담겼음을. 사련이 지긋이 눈을 감았다. 마지막 신도였던 이가 건넨 법력은 그에게 새로운 신도들의 모습을 비춰주었다. 한 집안의 사람만으로는 부족해 옆집, 그리고 또 옆집의 사람이 모여 단 하나의 장명등을 올렸다. 어떤 어린아이는 손바닥만 한 작은 석상 앞에 길에서 꺽어 온 듯한 꽃 한 송이를 두곤 양 손바닥을 마주 대었다. 사련님, 사련님. 이 꽃을 드릴게요.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더 이상 기원이 들려오지 않아서야 사련은 천천히 눈을 떠 저를 주목하고 있는 수십의 눈길을 마주보았다. 하하, 이젠 더 안하나요? 풍신, 다음엔 무얼 해? 사련은 이 부담스런 상황을 넘기려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풍신이 자신의 앞에 있는 음식 중 몇을 사련에게 건네주었다. 이에 사련은 아예 중앙에서 벗어나 풍신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련은 자신의 주변에 와 말을 건넨 배명, 간만에 상천정에 온 우사대인, 조금 거리는 있지만 의문에 착실히 대답해 주는 영문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제 앞에 놓인 풍신 몫의 음식들을 입에 넣어 조물거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귀에 담았다. 수십의 신관들은 그들의 지기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어디의 경치가 황홀 하다느니, 자신의 신도가 올린 글이 마음을 울린다느니. 어디에 사는 신도가 이러한 기원을 올렸는데 어찌 해야 할지 모른다는 말에 조언을 건네주는 목소리도 여럿 들렸다. 

  신관은 그저 하늘에 오른 사람일 뿐이라 하지만, 어찌되었던 그들은 신관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신을 저버렸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신을 찾았고, 신들은 그들의 목소리에 응답할 것이다. 여전히 천관은 복을 내릴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걱정 할 것은 하나 없을 것이다.

 

 * 

 

  연회가 끝나고 사련은 신도들의 기원을 들어주기 위해 하계로 내려왔다. 때론 나그네로 변장하여 부인을 두고 고시를 치르러 여행길을 걷는 서생과 함께 수도에 이르기도 하며, 때론 지나가던 가난한 도사가 되어 대접받은 한 끼 식사에 대한 보답으로 막 태어난 아이에게 법력으로 부적을 새겨주기도 하였다. 시기가 봄에 이르러 이르게 꽃을 피우니 어느새 네 번의 보름이 지났다. 그동안 화성과 매일같이 통령을 주고받았으며, 때로는 화성이 잘생긴 나그네가 되어 함께 동행하기도 하여 그들의 집으로 돌아온 것이 오랜만이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지난밤 화성이 통령으로 잠시라도 들려주길 바란다고 전하였었다. 사련은 거의 끝나가는 일에 속도를 붙여 가까스로 시간 맞춰 끝낼 수 있었다. 

  새로운 집은 보제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슷한 크기이며, 비슷할 정도로 낡았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은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을 구석에 위치한 편이며, 화성과 함께 고른 곳이란 점일 뿐이다. 사실 그들이 따로 집이 필요하진 않았다. 귀시장 전체가 화성의 것이었으며, 동시의 사련의 지반이었다. 허나 화성이 귀시장에 신관의 출입을 금했다. 그것에 사련이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적어도 그 규율에 따르는 척이라도 해야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보제관과 유사하며, 지난번과 같은 일이 일어나도 상대적으로 이목이 덜할 집을 골라 거처로 삼았다. 사련이 집에 다다르자, 부드러운 꽃내음이 그를 반겼다. 익숙한 냄새를 따라 언덕을 오르니 붉은 옷자락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삼랑. 그를 부르는 사련의 목소리에 화성은 부드러운 웃음으로 화답했다. 화성에겐 언제나 꽃향기가 풍겨왔다. 그렇기 때문에 나비들이 그를 따르는 걸까? 사련은 생각하며 작은 웃음을 띄었다. 화성의 곁에 이르니 화성은 손바닥이 보이도록 손을 내밀었다. 곧 앳된 장난스러움이 사라진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하, 이곳에서부턴 제가 모시겠습니다. "

 

  사련은 화성의 손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는 것으로 화답하였다. 마당의 문에서부터 집 앞까지 짧은 거리동안 화성은 마치 험난한 산을 오르는 것처럼 그의 손을 잡고선 천천히, 또 신중하게 발을 내딛었다. 사련은 자신의 손과 겹쳐진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와 재회한 밤을 재현 하는 것 같았다. 화성이 발걸음을 멈추자 사련 또한 발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니 익숙한 문 위에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진이 그려져 있었다.

 

"축지천리?"

"응. 이곳에서 하기엔 소란스러울 것 같아서. 자, 가자."

  

  화성의 말이 끝나자 오래된 문은 삐걱거리며 입을 벌렸다. 화성은 놓지 않은 사련의 손을 이끌어 문 너머로 걸어 들어갔다. 

  사련이 집에 도착한 것은 한밤중으로 꽤나 어두웠다. 축지천리의 문을 넘자 갑자기 쏟아지는 밝은 빛은 사련이 한순간 눈을 뜨지 못하게 하였다. 빛에 익숙해진 무렵 천천히 눈을 뜨니, 화려한 불빛의 등불과 스스로 빛을 내는 꽃송이들이 사방을 장식하고 있었다. 불빛 하나하나가 그저 불을 밝히는 것 뿐 아니라 저마다의 색을 가지고 있어 아름다운 장관이 펼쳐졌다. 사련은 제자리에 멈춰 사방을 둘러보았다. 한 개의 등불, 한 송이의 꽃. 하나하나 둘러보고 있자니 이곳의 풍경이 다소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천등관 이었다. 평소엔 최소한의 등불만을 비추며 고풍스러운 미를 뽐내던 곳이 이토록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하니 전과 다른 멋이 느껴졌다. 사련은 그를 바라보는 화성의 표정이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처럼 보였다. 정말 이뻐. 마음에 들어. 사련의 말에 화성의 눈이 더욱 가늘어지며 반달을 그려내었다. 아직 형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더 남았어. 화성은 사련의 손을 이끌고 또 하나의 문을 넘었다. 그곳은 방금 전과는 아예 다른 분위기의 방이었다. 수많은 날카롭고 단단한 것들이 사방을 빼곡하게 장식했으며, 은은한 불빛이 그것들의 광택을 돋보이게 하였다. 사련은 이 비슷한 방을 이전에도 한번 본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그때와 또 다른 새로운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형이 기뻐하니까. 그래서 기회 될 때마다 모아두었어. 기뻐하는 사련을 보는 화성의 목소리에는 뿌듯함이 묻어났다. 사련은 다양하고 고급스런 무기들로 가득 찬 무기고를 구석구석 꼼꼼히 살피며 감탄을 끊임없이 내뱉었다. 사련은 여전히 화성과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사련이 동쪽 모서리에 걸린 검에 다가가면 화성 또한 그 옆에 함께해 그것을 만든 장인부터, 그것이 품고 있는 일화까지 낱낱이 들려주었다. 그것을 수번을 반복하니 시간이 꽤나 흘러갔다. 사련은 문뜩 자신이 너무 어린아이 같았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자신의 옷깃을 매만졌다.

  화성은 또다시 사련과 함께 문을 넘었다. 주류로 가득한 방을 지나고, 산해진미가 가득한 방을 지나고. 때론 문을 넘어서니 인계의 소면집이 나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섞여 담소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니 어느새 해가 산등성이를 넘어 푸른 잎을 붉게 물들여갔다. 화성은 이번엔 축지천리를 이용하지 않았다. 높게 자란 나무들 사이를 지나 풀숲으로 들어가니 그곳에는 웬만한 사람보다 큰 해골이 어깨에 보련을 지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는 거야? 응, 재밌었어? 응, 즐거웠어. 화성과 사련이 올라탄 보련은 전처럼 빨리 달리지 않아 세상이 노을빛에 물드는 것을 천천히 감상할 수 있었다. 붉은 빛을 보니 사련은 두 달 전에 본 장명등이 떠올랐다. 사련은 보련 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저를 보고 있는 화성을 바라보았다.

  

"삼랑, 적안관은 언제 지은거야?"

"으음- 들켰어?"

  

  화성은 장난을 들킨 어린 소년마냥 웃어보였다. 사련은 옅게 웃음을 띄며 상체를 앞으로 뻗어 그에게 다가갔다. 그들의 입술은 단 한 치의 간격만을 두었다. 사련의 눈동자에는 오직 화성의 눈이 깃들었으며, 화성 또한 그러하였다. 사련은 손으로 보련을 짚어 상체를 살짝 들어올렸다. 사련의 입술은 화성의 입을 지나고 콧대를 지나서 그의 오른쪽 눈에 자리하고 있는 안대에 가 닿았다 떨어졌다. 숨길 생각은 처음부터 없던 거지? 사련은 화성을 보며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내가 숨기려고 했어도 형은 다 알아챘을걸. 화성은 제 몸에 붙은 사련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화성이 살짝 당기자 사련의 몸은 부드럽게 곡을 그리며 화성의 무릎 위에 걸쳐 앉게 되었다. 사련은 양 손목을 화성의 어깨위에 걸쳐놓았다. 그들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들은 그것이 자연스러운 듯 담소를 이어 나갔다.

 

"삼랑이 내 탄신절을 위해 이렇게 준비한걸 알았더라면, 상천정이 올라가지 않았을 거야."

 "아니야 형. 이건 형의 탄신(誕新)절을 기념하는 게 아니야. 이건, 형의 탄신(誕辰)일 선물이야."

 

  사련은 습관적으로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소리를 내진 못 하였다. 오늘은 사련 본인조차도 완전히 잊고야 만 그의 생일이었다.

  사람이 하늘에 오르면 그날부로 다시 태어났다 여겨진다. 그렇기에 사람으로 난 날을 기념하는 생일은 잊혀지고, 그들이 신으로서 다시 태어난 날만이 기억된다. 다른 신관들도 그렇게 생일을 잊고야 마는데, 본인의 탄신절도 기억하지 않는 사련이 어찌 생일을 기억했겠는가, 역사의 기록에서 선락국은 이름만이 남았으며, 마지막 태자는 '선락태자'라는 신명으로 남았을 뿐 그가 신이 되기 이전은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화성은 800년 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아무도 챙기지 않은, 본인조차 잊은 ‘사련’의 생일을 홀로 품어온 것이다. 사련은 문뜩 800년 전 생일이 떠올랐다. 사련이 생일에서 불과 두 달 전에 하늘에 오른 탓에 선락황실에서는 태자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준비했던 모든 것을 물러야 했다. 사련의 생일 밤, 모후는 황궁 중앙에 세워진 선락태자 신상 앞에 서서 사련의 이름을 불렀다. 모후가 그를 위해 무엇을 준비 했었는지. 그날이 원래 어떻게 흘러갈 예정이었는지. 하나하나를 전부 신상 앞에 풀어놓았다. 사련이 그 이야기를 듣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모후는 말했다. 사련이 태어난 이래 처음으로 아무것도 아니게 된 날에, 모후는 잠을 이루지 못 하였다. 사련은 모후께 인사를 건네고 싶었지만 그는 쉽게 모습을 내보여선 안 되는 신관이었으며, 모후께서 잠에 들지 않아 꿈속에서조차 만나지 못했었다. 지난 일을 떠올린 사련의 속눈썹이 낮게 내려왔다. 화성은 그늘진 사련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적안관의 장명등은 귀왕도, 혈우탐화도 아닌, 그저 전하께서 구하신 붉은 눈의 소년이 제 신앙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당신은 수천의 불빛도 부족한 사람이지만, 당신에게 수천의 등불을 올린 신도도, 단 하나의 등불을 올린 신도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당신께서 다른 신도에게 향할 자애로운 눈을 가리고 싶지 않기에, 더는 욕심내지 않았습니다."

 

  화성의 진중한 목소리에 사련을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화성이 이번에도 삼천 개의 등을 올렸더라면, 사련은 평범한 사람이 올린 두개의 불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삼천 개의 등불을 올리던 때에도, 단 하나의 등불을 올리던 때에도 화성은 언제나 사련을 위한 최고의 선택을 하였다. 고마워. 사련의 짧은 대답이 지나자 사련만을 바라보는 화성의 눈동자가 점점 다가왔다. 사련의 허리를 두른 손에는 어떠한 힘도 가해지지 않았다. 그저, 사련의 곁으로 화성이 다가왔다. 마침내 두 입술을 굳게 포개어졌다. 얇은 살가죽 아래의 뜨겁게 흐르는 혈액이 서로 만나는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서로를 탐닉하는 입술이 떨어졌을 땐 사련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화성의 얼굴 또한 붉게 물들었다. 화성의 피부가 혈색 돋을 리 없으니, 이것은 노을이 진 탓 일 것이다. 사련은 이 순간이 좋아 보련이 영원히 걸었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태양은 영원토록 세상을 붉게 물들여주길 바랐다. 하지만 모든 것은 결국 끝이 있는 법이다. 사련은 화성의 무릎에서 일어나 그의 옆에 앉았다. 화성을 담았던 눈은 시선을 돌려 보련을 이끄는 해골에게로, 붉은 풍경에게로 향하다 다시 화성에게로 돌아왔다.

  

"그럼 이것은, 화성이 바치는 사랑이야?"

  

  화성의 얼굴이 기울어지며 사련에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입술이 아닌 이마가 서로 맞닿았다. 한층 가까워진 눈은 서로를 응시할 뿐이었다. 사련의 눈매가 휘어져 반달을 그려내자, 화성 또한 둥글게 호를 그려내었다. 보다 좁아진 눈틈 사이로는 오직 서로만을 바라보았다.

 

"난 삼랑이라고 불리는 게 더 좋아."

  

화성의 목소리는 무척 장난스러웠다. 노을 속을 가로지르는 보련 위에는 오직 두 사람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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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미 - 誕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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