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릇 한 사람이 살면서 겪었던 일들을 모두 선명하게 기억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러저러한 일을 잊어버리며 살아간다. 그들은 이것이 유한한 삶을 사는 평범한 인간의 한계라고 생각하고, 여느 신神들은 다를 것이라 착각하지만, 사실 비인간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들도 한때 인간이었던 존재들이었는데, 어찌 그 본질이 쉽게 지워져 내리겠는가? 오히려 잊는 양을 따진다면 그들이 잊는 것들이 더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도 일을 중重과 경輕으로 분류하여, 중요하지 않은 일은 멀리 떠내려 보내고, 중요하다 여기는 일은 가라앉혀 그들의 삶에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넝마를 줍는 백의도인으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온 사련에게 스스로의 생일은 이 ‘중요하지 않은 일’에 포함되었다. 뭐, 생일을 안다고 해서 갓 찐 따끈따끈한 만터우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생일이라 함은, 일 년, 즉 365일 중 딱 하루만 있는 날이 아닌가. 아무리 사련이 열일곱이라는 어린 나이에 등선하여 대략 스무 번은 국가적인 규모의 사랑과 축하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로 강과 바다같이 끝없이 흘렀던 불행의 연속은 수많은 축복의 기억을 덮어내기에 충분했다. 첫 번째 폄적 이후 그는 주변 사람들을 챙기며 하루하루를 살아남기 위해 생일 따위를 챙길 여건이 되지 않았으며, 근 두 번째 폄적 이후에도 여러 사정이 있었던 만큼 생일을 챙기고 싶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는 더 이상 한 나라의 태자가 아니었으니, 생일을 챙기는 사치 외에도 처리해야 하는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는 길거리에서 기예를 팔면서 넝마를 주워야 했고, 한 나라의 태자를 어떻게 가르칠지 고민해야 했고, 그 자신과 더불어 위장이 튼튼하지 않은 아이를 위해 부드러운 음식을 마련해야 했으며, 어떻게 그가 장군으로 자리 잡은 군대를 이끌어 사상자를 최소한으로 낼 수 있을까 방책을 마련해야 했다. 세 번째 비승 후에도 그가 처음 맞는 생일 또한 일이 바빠 미처 신경 쓰지 못했고, 이를 챙겨주는 신도조차 하나 없었으니 사련은 생일을 축하받기는커녕 기억해내는 것도 익숙지 못했다. 따라서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사련은 진즉에 그의 생일을 까마득히 망각한 것이다. 어찌 본다면 이것은 그의 놀라운 적응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것에 더해, 사련은 사랑에 눈이 아주 철저하게 멀어버린 상태였다. 여러 일이 마무리지어지고, 6개월간의 길고도 짧은 기다림 끝에 그의 혈우탐화는 드디어 그에게 돌아왔다. 사련은 화성의 어리광을 받아주느라 바빴고, 다른 것에는 신경 쓸 여유도, 관심도 없었으니, 그가 갑자기 스스로의 생일 날짜를 기억해낼 가능성은 더더욱 없었다. 그리하여 이른 아침, 영문전에서 그가 일을 처리하던 와중, 휘파람을 불며 놀러온 명광장군이 은근슬쩍 그의 허리를 찔러오며 그에게 생일 계획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을 때, 사련은 놀란 족제비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레 배명에게 묻게 되었다.
생일 계획이요? 곧 있으면 누군가의 생일인가요?
예? 태자전하, 내일은 태자전하의 생신 아니십니까?
배명 또한 놀란 건지, 장난스레 올라갔던 입꼬리가 싹 내려앉았다. 사련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그는 고심하며 수많은 정보의 파도 속을 뒤지다, 간신히 선락국에서 그의 생일 연회가 성대하게 치러지던 계절이 더운 여름이었음을 어렴풋이 기억해냈다.
아마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아마 그런 것 같다고요? 설마 본인의 생일을 잊으신 겁니까?
황당하다는 목소리에 사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배명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영문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아마 그에게 사련의 생일 날짜를 전했을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대답했다.
네, 신관들에 대해 기록해두는 서책에 적혀 있었으니 틀림없을 거예요. 제 선임자가 조금 멍청하기는 했지만, 이런 면에서는 철저했을 터이니.
그렇군요.
마치 본인의 생일이 아닌 다른 사람의 생일을 전해듣는 듯한 태도에 배명은 영문과 사련을 재차 한 번씩 번갈아 보더니,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역시 고위 무신 중 하나인지라 눈치가 느리지는 않아, 금방 사련의 처지를 알아차린 듯하였다. 그는 머쓱한 듯 뒷머리를 살짝 긁더니, 후에 그를 보조하는 신관 중 하나를 보제관으로 보내겠다고 말하였다. 사련은 쓸데없이 공손함을 내세우기 위해 베풀어지는 호의를 굳이굳이 한 번은 거절하는 번거로운 성향은 아닌지라, 배명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며 눈을 휘었다.
***
영문과 그에게 배당되었던 일에 대한 논의를 마치자마자, 사련은 귀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르고 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막상 바로 다음 날이 그의 생일임을 자각하고 난 뒤로 그는 스스로가 조금 들떴다는 것을 느꼈다. 그의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보낼 것이라 예상했던 생일 전날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아마 특별한 누군가가 그에게 생겼기 때문이리라. 그 특별한 누군가에 대해 생각하자마자 사련의 온 몸에 따스함이 감돌았다.
물론 그는 무언가를 과시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그가 분명 이 소식을 전한다면 화성이 그를 축하해주기 위해 무슨 일을 꾸밀지 몰랐기 때문에, 화성에게는 이를 전하려는 마음은 추후도 없었다. 그저 난생 처음으로 애인과 생일을 함께한다는 자기만족이 컸다. 허나 평화롭게 생일을 보내겠다는 그의 계획이 무색하게도, 사련은 극락방에 도착하자마자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귀신들이 구석에 잔뜩 모여 무언가를 둘러싸고 시끄럽게 쑥덕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보기 위해, 무리의 중심에 고개를 스윽 들이밀었다.
무슨 일이죠?
큰아… 아, 아니, 사 도장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어서 이것 좀 보세요, 어서요!
방금 전까지 크게 곤란해 하던 귀신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귀신들이 사련들에게 길을 내주자, 작은 그림자가 즉시 구석에서부터 사련의 뒤로 뛰어들었다.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동체시력이 뛰어난 사련은 그 그림자가 붕대로 얼굴의 반을 칭칭 감은 어린아이임을 알아보았다. 사련이 고개를 숙여 아이의 용모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니, 아이는 수줍음을 타는 양 고개를 돌리기는 했으나 그에게서 도망가지는 않았다.
사련이 아이의 정체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비록 아이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처럼 온 몸이 더럽지는 않았으나, 극락방에서 발견되었고, 오른 눈을 가리고 있는데다가, 그에게 호감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증거는 차고도 넘쳤다. 그 아이는 한때 그가 직접 상원절의 신무대로에서 받아내고, 선락국사가 기겁하며 천살고성의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선언한 그 아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 아이는 어린 화성이다.
검고 너덜너덜하게 헤진 상의를 걸친 있는 아이는 작은 손으로 사련의 하얀 소매를 꽉 그러쥐었다. 팽팽해지는 천자락을 통해 사련은 간접적으로나마 아이의 악력이 얼마나 억센지 가늠할 수 있었다. 한 귀신이 이 틈을 타, 빠르게 그들의 행동을 변명하듯이 말했다.
글쎄, 사 도장님. 저희도 이게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도박장에서의 일정이 계획되어 있었던 날이었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성주께서 도착하시지 않지 뭐예요. 그래서 사람을 보내 성주의 방문을 두드렸는데, 아무런 대답도 없었더랍니다. 그래서 저희가 모여 오랫동안 고심하다 문을 직접 열어보았는데, 이 어린아이가 있지 뭡니까. 원체 수상해서 잡으려고 했는데, 워낙 요리조리 도망치는 바람에….
사련은 머리끝만 빼꼼 내밀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파악하려고 하는 듯한 작은 아이를 안아들었다. 그는 한 손으로는 아이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아이는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사련을 꼭 끌어안았다. 사련은 미간 사이를 문지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지금 비는 손이 없었다. 사련은 그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해준 귀신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인, 아니, 하현월사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그건 저희도 모릅니다. 아마 성주께서 시키신 일을 하시러 떠나신 것 같으신데, 연락할 수단이 없어서요.
화성도 없고, 그의 오른팔도 없다고 판단한 귀신들이 이제 누구의 지시를 기다리는지는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뻔했다. 사련은 귀신들에게 제가 아이를 돌볼 테고, 화성의 행방을 알아볼 테니 걱정하지 말라 이르고는, 각자가 귀시장의 본업으로 돌아가기를 권했다. 그가 두 번 말할 필요도 없이, 귀신들은 쏜살같이 흩어졌다.
평소 극락방 안을 아름다운 목소리로 장식하던 여인들조차 그 자취를 드러내지 않았고, 두 사람만이 텅 빈 공간에 남았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사련은 그의 품에 안긴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놓지 않겠다는 기세가 느껴질 정도로 그를 단단히 껴안고 있었고, 검고 커다란 눈은 홀린 듯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련이 살풋 웃었다. 앳된 소도사들의 웃음소리가 다시금 사련의 귀 옆에서 들렸다. 푸하하, 태자전하, 이 아이는 가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시선이 마주치자 아이는 황급히 사련을 바라보던 울망한 눈을 내리깔았다. 사련은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머리를 쓰다듬어주다가, 우선 평상시에 화성이 상주하는 침실로 들어갔다. 홍의귀왕의 이러한 모습을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화성이 제대로 돌아올 때까지 극락방 안에서만 상주하기로 한 사련의 판단 하에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이미 붕대로 칭칭 감긴 한쪽 눈을 통해 아이의 정체를 미심쩍어하는 귀신들은 분명 있을 것이나, 그들은 그들의 성주를 위해서라도 그것을 천리만리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었다. 문제는 가끔씩 몰래 귀시장에 숨어들어오는 신관들이었다. 사련이 화성을 지킨다는 사실을 제쳐두고, 천하의 누가 감히 혈우탐화를 해할 생각을 하겠지만은, 절경귀왕의 체면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사련은 예전에 줄어들었던 화성이 스스로의 어린 모습을 보이는 게 싫다고 투정을 부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련이 화성의 침상을 살피자, 하룻밤 사이에 주인을 잃고 혼자 남겨진 액명이 침대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 곡도는 눈을 감고 있다가, 인기척을 감지하고 외눈을 시뻘겋게 떴다. 세로로 길쭉한 검의 동공이 사련을 향했고, 곧 반달 모양으로 즐겁게 휘어졌다. 액명은 그에게 언제나 그랬듯 자신을 알아차려달라고 윙윙 울었다. 사련의 품에 안긴 아이도 진동을 느꼈는지, 그 근원을 파악하려는 듯 주변을 둘러보다가, 액명을 보고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아이는 순식간에 사련의 품에서 벗어나, 몹시 용맹한 기세로 곡도를 침대 끄트머리로 차 버렸다. 액명은 어린 주인의 발길질에 반항하지도 못하고 바닥에 쨍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 곡도는 분한 듯 검 끝을 바닥에 세우며 껑충거리다가, 바닥을 이리저리 굴렀다. 아이는 사련을 지킬 심산인 듯 경계심을 세우고, 곡도와 사련의 사이를 막아섰다. 사련은 그를 지켜주려는 아이의 행동에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아이를 자상하게 타일렀다.
그러면 안 돼. 액명은 좋은 칼이야.
좋은 칼이요?
응, 좋은 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는 것보다는 빠를 것이다. 사련은 아이의 앞을 지나쳐, 곧 그렁그렁한 눈물을 떨어트릴 것 같은 액명을 주워들어 품에 안고, 늘씬한 검신을 여러 차례 토닥였다. 액명은 사련의 손길이 닿자마자 작은 한숨을 내쉬듯이 떨었다. 만족했다는 의미일 터다. 흡사 울음을 터트린 갓난아이를 익숙하게 달래는 양육자 같은 모습에, 아이는 옆에서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사련을 지켜보았다. 사련은 아이의 시선을 눈치채고, 속으로 미소를 짓고선, 칼집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착하지, 가만히 있어주련.
액명은 착하고 좋은 칼답게 금방 얌전해졌다. 사련은 액명을 침상의 머리판에 세워두었다. 그는 그의 뒤에서 여전히 경계심이 만연한 채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아이를 그의 무릎에 앉혔다. 꼭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그가 앞으로 어린 화성을 몇 번이나 그의 무릎에 앉힐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면, 사련은 그러지 않고 버틸 수 없었다. 그는 아이의 경계심도 풀어낼 겸, 그가 궁금한 점을 묻고자 아이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기로 했다.
어쩌다가 이 곳에 오게 되었니?
…잘 모르겠어요.
그럼, 지금 몇 살이니?
열 살이요.
사련은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나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이름은 머리에 안개가 낀 듯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았지만, 당시 아이가 덩치에 비해 나이가 많아 놀랐기 때문에, 이것만은 확실하게 기억이 났다. 아이가 그에게만은 경계심을 보이지 않아 다행히도 안면이 트인 시점으로 돌아간 것이라 짐작은 했었지만….
본래 사련은 아이의 이름을 물어보려고 했다. 사련은 아이가 어렸을 당시 이름이 화성이나 삼랑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했지만, 정확한 이름이 흐릿하고 영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허나 열 살, 열 살은 너무 애매했다. 적당히 시간이 흐른 뒤였으면 오래되어서 잊어버렸다고 얼버무리며 물어볼 수는 있었지만, 이름을 알려준 바로 그 해라면 너무 무심해 보이지 않겠는가. 다르게 생각해서 아이가 그에게 이름을 알려주기 전이라는 가능성도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처음 만나고, 아이가 척용의 마차에 끌려 다녔던 건 고작 하루 차이였는데, 어떻게 그가 그 적디 적은 확률에 전자의 위험을 떠넘길 수 있겠는가. 사련이 잘 생각해 보니 그가 그를 위해 살라는 허무맹랑한 말을 아이에게 내뱉었을 당시에도 그는 아이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800년이 지난 지금은 더욱 기억날 리가 없다. 결국 이름을 부르는 것을 피하는 게 최선책이리라고 결론을 내린 사련은 조금 서글퍼졌다. 그는 다정한 음색으로 말을 이어갔다.
갑자기 이상한 곳에서 일어나서 무서웠지? 여긴 내 집이란다. 아까 그 사람들도 나쁜 사람들이 아니야. 음, 혼란스럽기는 하겠지만 큰 걱정은 마렴. 언제까지 여기서 머무를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내가 지켜줄게.
아이는 이 말을 듣고 몹시 기뻐하는 표정이 되었다가, 금세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아이는 자신의 두 손을 맞잡고 꼼질거렸다. 사련은 급격하게 변한 아이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걱정거리라도 있니?
아이의 표정이 점점 더 침울해졌다. 입꼬리가 너무 내려가서 곧 있으면 아이의 턱에 작은 호두라도 생길 것 같았다. 사련은 아이의 대답을 듣기 위해 온갖 좋은 말으로 아이를 구슬렸다. 끝내 아이는 점점 작아지다 못해 사라지기 일보직전인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전하… 께서는, 바쁘지 않으세요?
그거라면 걱정 마렴. 마침 오늘 아침에 일이 모두 끝나서 하나도 바쁘지 않지 뭐야. 오히려 심심해서 뭘 할지 고민하던 참인데, 괜찮다면 같이 놀아주지 않을래?
사련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자, 아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정말요?
사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아이는 재차 확인하듯이 다시 물었다. 제가 전하를 귀찮게 해 드리는 건 아니죠? 사련은 과장된 몸짓으로 두 손까지 내저으며 말했다. 전혀 그렇지 않아. 내가 그랬으면 좋겠어? 아이는 재빨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련은 아이다운 성급한 행동을 보고 입술을 깨물어가며 웃음을 참았다. 평소의 여유 가득한 삼랑도 엄청 귀엽지만, 어린 삼랑도 정말 귀여워!
잠시 후 사련은 창고에서 금박 백팔 장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나무 상자를 꺼내 왔다. 이 금박은 사련이 처음 귀시장에 방문했을 때 화성이 가지고 놀았던 것으로, 나중에 두 사람이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을 때마다 화성이 종종 꺼내오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내기를 하자고 늘 사련을 보채곤 했는데, 그가 항상 내거는 조건은 서예 연습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사련은 아이에게 평소 비는 시간에 무엇을 하며 노냐고 물을 수도 있었지만, 아이가 후에 그의 사당에서 몸을 위탁했던 점과, 모두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이는 아마 평상시에 함께할 또래 아이도, 놀 시간도 없었을 것 같았다. 그러니 아이에게 질문을 하여 상처에 소금을 문지르기보다는,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놀이를 그가 주도하며 하나 둘 시도해보는 게 더 바람직해 보였다.
사련이 상자의 뚜껑을 열자마자 천장에 화려하게 걸린 조명이 금박을 비추어 매끄러운 표면을 빛냈다. 아이는 그렇게나 휘황찬란하고 사치스러운 장난감을 처음 쥐어보는지, 사련이 그것을 바닥에 펼쳐놓아도 영 손을 대지 못하였다. 그가 직접 궁전을 쌓으며 시범을 보여주어도 아이는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을 뿐, 반응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삼랑은 이 놀이를 엄청 좋아하니까, 어린 삼랑도 좋아할 줄 알았는데. 사련의 걱정을 눈치 채기라도 한 것인지, 아이는 금박을 황급히 집었다가 그만 손이 미끄러져 그것을 떨어트려버렸다. 아이는 안절부절못하며 떨어트린 금박을 주워 앞뒤를 살펴보았다. 혹여나 긁힌 자국이라도 있는가를 확인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사련은 미세하게 떨리는 아이의 손을 그의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건 네 거란다.
저한테 주시는 건가요?
아이가 깜짝 놀라며 묻자, 사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원래 네 거야.
하지만 저는 이걸 가지고 놀아본 적도 없는걸요.
사련은 잠시 고민하다가, 어린 아이가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설명하기로 했다. 그는 방석 두 개를 가지고 와, 하나는 스스로의 다리 밑에, 다른 하나는 아이의 앞에 놓고선, 자신 몫의 방석 위에 풀썩 앉았다. 아이는 멀뚱히 서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그를 바라보았다. 사련이 아이에게 앉으라고 권하자, 아이는 경첩에 기름이라도 바른 문처럼 고개를 빠르고 크게 끄덕이고는 방석 위에 반듯하게 앉았다. 허리를 꼿꼿하게 피는 모습이 마치 사련에게 의젓하게 보이려는 모습 같았다. 화성이 언제부터 그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아는 사련은 이 모습이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그는 중요한 비밀에 대해 논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목소리를 낮추었다.
지금부터 내가 비밀을 하나 말해줄 건데, 믿어줄 수 있어?
끄덕끄덕.
믿기 어려울지도 몰라.
끄덕끄덕.
사련은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단순하게 아이가 처한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만난 지 800년이나 지난 후야. 우리는 몇 백 년 동안 헤어져 있었다가 고작 몇 년 전에 만났고, 다시 만났을 때 너는 이 집의 주인이 되어 있었어. 사련은 이전에 스스로가 아이에게 이 집이 제 집이라고 소개했던 것이 생각나, 괜히 어색하게 몇 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다가 음, 우리가 어떤 관계로 발전해서, 내 집도 네 집이 되었고, 네 집도 내 집이 되었어. 그러니까 우리 집은 두 채인 거지. 사련은 괜히 어린 화성에게 그들이 어떠한 연유로 화성의 집이 자신의 집이 되었고, 자신의 집이 화성의 집이 되었는가를 설명하기 부끄러워 어물쩍 어려운 단어를 쓰며 구체적인 묘사를 아슬아슬하게 피해갔다. 그는 부끄러워 달아오르는 얼굴에 손부채를 얼굴에 부쳤다. 아무리 그가 오랜 세월을 살며 철면피를 필수불가결하게 세우게 되었다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어린아이보다 그는 최소 팔십 배는 나이를 더 먹은 상태였다! 아무리 아이가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 하지만, 그가 새파랗게 어린 아이에게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아이는 유일하게 노출된 한쪽 눈을 깜빡거리면서, 사련이 한 마디를 끝낼 때마다 연신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렸다. 아마 열 살에게 ‘관계가 발전했다’라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을 테지만, 고맙게도 아이는 복잡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궁금한 점을 사련에게 물어오지 않았다. 사련은 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아무래도 좀 믿기 힘들지? 지금의 평범한 아이에게 그렇게나 오랜 세월을 살았다는 말은 극히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것이다.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거잖아요. 그러니까 믿어요. 아이의 말에는 앳된 얼굴과는 사뭇 무게가 다른 묵직한 신뢰가 녹아 있었다.
사련은 순간 형용하기 어려운 느낌이 들었지만, 이를 애써 티내지 않기 위해 표정을 열심히 가다듬었다. 대신 그는 아이가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들고 있는 금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건 네 집에 있는 물건 중 하나야. 미래의 네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물건 중 하나지. 잃어버려도 괜찮고, 흠집이 나도 괜찮아. 중요한 건 네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거야. 그래도 여전히 이 놀이가 부담스럽다면, 다른 놀이를 찾아보자. ……. 아이는 머뭇거리다 물었다.
전하께서는 이 놀이를 좋아하세요?
그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즐겨 하는 놀이란다.
당장 며칠 전만 해도 그와 화성이 함께 금박 궁전을 쌓았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 말의 어느 부분이 아이에게 용기를 주었는지, 아이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면 저도 해보고 싶어요.
아이는 바닥에 놓인 금박을 주워들더니, 사련이 설명해준 대로 곧장 삼각형을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사련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고, 그 또한 아이의 옆에서 작은 궁전을 신중하게 지어나갔다. 그는 첫 층에 삼각형 다섯을 쌓은 뒤 아이가 얼마나 진전했는가를 보기 위해 눈을 몰래 굴렸다. 놀랍게도 아이는 사련에게 크게 뒤처지지 않는 속도로, 매끄러운 바닥 위에 금박 세 쌍의 중심을 세워놓은 상태였다. 어지간한 성인 남성에게서도 보기 어려운 훌륭한 집중력과 순발력을 목격한 사련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아이를 크게 칭찬했다. 정말 잘 쌓는구나. 대단해! 아이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작은 입술 사이로 감사하다는 한 단어만이 어름거리며 흘러나왔다.
사련은 그가 세운 작은 궁전 옆으로 금박 몇 쌍을 더 쌓아, 아이와 그의 궁전을 연결시켰다. 아이는 열중하고 있는지 이를 눈치 채지 못하고, 한 줄씩 차분하게 쌓아올리며 궁전을 높여갔다. 뒤늦게 아이는 자신의 궁전이 확장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집중력이 흩어지며 사련을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결국 팔꿈치로 금박 궁전의 한 모서리를 잘못 건드리는 대참사가 났다. 비록 높지는 않았으나 그 길이로 장황함을 뽐내던 황금빛 궁전은 삽시간에 와르르 바닥으로 쏟아져 버렸다.
아이의 두 손은 갈 곳을 잃고, 금박을 쌓으려고 했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금빛이 일렁이며 흩어졌다. 아이의 발 위로 금박 한 장이 팔랑거리며 내려앉자, 아이는 비로소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듯 했다. 검은 동공이 빠르게 축소했다. 사련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이는 사련의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사련은 아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지만, 일단 괜찮다는 말로 아이를 어른 다음, 가벼운 움직임으로 아이를 들어 푹신한 방석 위에 앉혔다. 그는 아이의 바지 밑단을 돌돌 걷어 올렸다. 아이는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지만 사련이 그를 해하지 않을 걸 아는 듯, 발버둥치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사련이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희고 가는 다리에는 멍이 얼룩덜룩하게 물들어있지 않았다. 다행히도 아이가 주저앉으며 났던 커다란 소리에 비해 무릎에 가해진 충격은 크지 않았나 보다. 사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아이에게 다시 한 번 일러 주었다.
이런 실수도 놀이의 일부분이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그는 아이의 작은 무릎을 부드럽게 주물렀고, 아이는 고개를 움츠렸다. 사련은 실망한 기색이 얼굴에 역력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다시 만들면 되지.
그리하여 두 사람은 두 번째 황금 궁전을 짓기 시작했고, 이는 첫 시도보다 빠르게 완공되었다. 아이의 키는 아직 궁전의 윗부분까지 닿기에는 역부족이라, 쌓지 못한 금박이 열 장 가량 남았을 때부터 사련은 아이를 직접 들어 올려주었다. 작은 손이 마지막 한 쌍의 금박에서 떨어지자, 사련은 아이를 안전하게 내려주고,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는 아이가 그들이 지은 궁전을 살펴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의외로 아이는 숭려한 궁전이 아니라 사련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나요?” 라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딱히 더 해야 하는 건 없어. 계속 세워둬도 되고, 무너트려도 돼. 어떻게 하고 싶니?
전하는 평소에 어떻게 하세요?
아이의 주어는 여전히 사련에게 머물러 있었다.
나?
아이는 또다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련은 오른손을 들어 볼을 긁으며 말했다.
나는 무너트리는 걸 좋아하지는 않아. 큰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어렸을 적의 습관인데…. 공들여서 지은 탑이 무너지면 속상해서 며칠 동안 잠에도 못 들곤 했거든.
그는 괜히 그가 그 기간 동안 펑펑 우는 탓에 부황과 모후께서 그를 달래주어야 했다는 부연설명을 하지 않았다. 화성은 그와 800년 전에도 나누었던 대화를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 정도의 뛰어난 기억력이라면 분명 그의 몸이 본래대로 돌아온 이후에도 그 사실을 기억할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아니,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화성은 처음 그가 극락방을 방문했을 때 그 금박전을 무너트렸을지도. 사련이 이러저러한 과거를 회상하는 사이, 아이는 결정을 마치고 말했다.
그러면 저는 궁전을 무너트리지 않을래요.
그리고 만약 궁전이 쓰러진다면, 몇 번이라도 전하를 위한 궁전을 세워 드릴게요. 비록 아이의 목소리는 가늘었고, 문장 또한 화려하지 아니하였으나, 그 속에 담긴 진심이 투박하게 드러나 아이의 진심을 두드러지듯 나타냈다. 사련은 이에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들여다본 아이의 눈은 온 밤하늘을 머금은 것처럼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앞으로 제가 더 많고, 더 크고, 더 화려한, 아무도 못 오를 궁전을 만들어 드릴게요! 문득 같은 목소리의 한 우렁찬 다짐이 사련의 머릿속을 스쳤다. 사련은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삼랑은 정말 한결같구나. 그는 한참을 웃다가, 아이가 무안할 수 있다 싶어 두어 번 목청을 가다듬고서 말했다. 아주 듬직한걸, 고마워.
그나저나 슬슬 저녁을 먹을 시간이네. 배고프지? 먹을 걸 좀 가져올게. 사련의 물음에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배고파요. 어려졌기는 해도 귀왕의 몸이라 배가 고프지는 않은 건가, 라는 의문이 사련에게 들었을 무렵, 그의 옆에서 작게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빠르게 배를 움켜쥐었다. 사련이 눈썹을 기울이자, 아이가 황급히 말했다.
전, 전하께서 그러시는 것은 옳지 않잖아요.
사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 옳지 않아?
음식을 내오는 거요.
왜 그렇게 생각하니?
그건 신분이 더 낮은 사람의 몫이잖아요.
사련은 고개를 저었다. 중신평등, 중생평등. 들어본 적 있어?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사련은 스스로의 심장과 아이의 심장을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너도, 나도, 평등하다는 뜻이란다. 그러니까 내가 음식을 내오든, 네가 음식을 내오든, 옳지 않은 일은 없단다. 어차피 미래에는 내가 너를 위해 요리도 하는걸. 아이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제가 전하께서 만들어주시는 음식을 먹는다고요?
그럼.
오늘도 먹을 수 있나요?
사련은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의 옥결빙청환을 먹고 온 몸이 짙은 푸른색으로 변해 보제관에서 비틀비틀 기어가던 한 무신을 떠올리곤 움직임을 멈췄다. 화성은 언제나 낯빛 하나 달라지지 않고 그의 요리를 진식盡食했기에 차마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신체가 단단한 편인 기영도 그의 음식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속을 게워냈는데, 과연 삼랑은 이 여린 몸뚱이로도 그의 요리를 버틸 수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사련은 말을 더듬거렸다.
그, 그런데 오늘은 요리하기엔 조금 더워서, 내일 먹는 건 어떻게 생각하니….
***
식사를 마친 뒤, 사련은 아이와 손을 맞잡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주사위를 굴리기도 했고, 무기고와 천등관을 둘러보기도 했으며, 넓은 극락방 안에서 숨바꼭질을 하기도 했다. 아이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인지, 한 시진이 더 지났을 즈음엔 아이의 경계가 완전히 풀려, 익숙하지 않을 극락방 안을 맨발로 뽀르르 뛰어다녔다. 사련은 드디어 제 나이대와 어울리도록 활짝 웃는 아이를 보고 큰 행복을 느꼈다. 몇 백 년 전에 그가 아이에게서 볼 수 없었고, 차마 누리게 해줄 수 없었던, 그러한 행복이었다.
늦은 시간이 되자 커다란 침상에 얌전하게 누운 아이 위로 다정하게 이불이 덮어졌고, 옆으로는 휘장을 사르르 내려졌다. 사련이 등불을 손가락으로 비벼 끄고, 고개를 돌려 방에서 나가려고 순간, 그의 옷 끝자락을 주욱 늘어지듯이 잡아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야? 그가 아이의 말을 들어주기 위해 어둠 속에서 고개를 기울이자, 아이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오늘 재미있었어요.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해요, 전하.
다행이야. 사련은 아이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천천히 쓰다듬었다. 나도 정말 즐거웠어. 이 맥락만 본다면 대화는 사뭇 끝이 난 듯싶었으나, 아이는 여전히 사련의 옷을 놓지 않았다. 더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니? 사련이 웃으며 묻자, 아이는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자기 전까지 같이 있어주시면 안 돼요?
사련은 밤 내내 같이 있는 것도 괜찮다고 대답하며, 아이의 옆자리로 기어들어갔다. 그는 더듬더듬 어둠 속에서 아이의 어깨가 있을 위치를 가늠하다가, 의도한 자리를 찾고는, 천천히 아이를 도닥여주었다. 그것은 아이가 잠에 들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배려 같은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반대의 효과를 내게 되었다. 아이가 고개를 돌려, 사련의 귓가에 베개의 원단이 새로이 짓눌리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련은 아이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확신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기에, 그 또한 아이가 있을 자리를 빤히 마주보았다.
….
…….
……….
결국 참지 못하고 둘 사이로 기묘하게 눌어붙은 정적을 먼저 갈라낸 사람은 사련이었다.
그런데 삼랑아, 언제까지 그 모습으로 있을 거야?
다시 단시간의 침묵이 흘렀고, 사련의 손 아래로 놓인 어깨가 자연스레 넓어지며 탄탄한 근육이 잡히는 느낌이 들었다. 사련의 예상대로였다. 곧 그의 귀에 익숙한 성인 남성의 미성이 경쾌하게 이어졌다.
역시 형은 대단해.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삼랑도 참, 짓궂기는. 당연히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어린 삼랑이 구석에 몰려서 벌벌 떨고 있을 리가 없잖아. 삼랑은 어렸을 때부터 매우 용맹한 아이였는걸. 만약 정말 정신까지 어려졌던 거였다면 귀신들 사이를 박차고 나가서 귀시장의 미아가 되었겠지. 삼랑도 내가 영문한테 통령을 보내지 않을 때부터 알고 있지 않았어?
화성은 사련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의 허리에 손을 올리며 즐거운 목소리로 동문서답을 입에 올렸다.
형이 그렇게까지 삼랑을 높게 생각해주니 기쁜걸.
사련은 못 말리겠다는 듯 그를 따라 웃었다.
그런데 삼랑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어?
물론 나는 어린 모습을 싫어하지만, 그건 힘도 함께 줄어들어서 무력해졌을 때의 이야기야. 동로산 때 형이 내 어린 모습을 엄청 좋아했는데, 그때는 워낙 정신없이 바빴잖아. 내일은 형의 생일이잖아. 형이 뭘 좋아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이걸로 생일 선물을 전했지.
나는 함께 보내는 걸로 충분한데.
형은 내 생일에 그렇게나 멋진 선물을 줘 놓고는?
사련은 그의 엉성한 바느질 솜씨를 생각해내곤 한숨을 푹 쉬었다. 그는 화성이 진심으로 그를 칭찬하는 걸 알고 있었으나, 모정의 핀잔을 통해 확실하게 그의 작업이 회생불가라는 것 또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이에 대한 대화를 이어가면 불가피하게 더 많은 화성의 찬사가 이어질 것을 알고 있어, 부끄러움에 어물쩍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그런데 삼랑아, 왜 하필 이걸 생일 선물으로 정한 거야?
알고 싶어?
화성이 사련에게 단단하게 몸을 밀착해왔다. 분명 화성의 심장은 뛰지 않을 텐데, 투명한 맥박이 사련에게 전달되어 쿵쿵 뛰었다. 사련은 이어질 행위를 곧장 짐작하고, 귀 끝이 터질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얼굴이 화끈화끈해져, 어려졌던 화성보다 푹 고개를 숙였다. 방 안이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만약 아직도 등잔에 불이 붙어 있다면, 그의 얼굴이 가을의 단풍보다 더 붉게 물든 모습이 훤히 보였을 테니까. 화성이 사련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이미 제 모든 걸 전하께 드려서, 더 이상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더운 숨결이 사련의 입술에 닿았다. 나비가 꽃에 내려앉듯이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화성은 사련에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빈틈없이 얽히며 두 사람의 숨이 서로를 오갔고, 혀가 부드럽게 섞였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사련에게 숨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에서야, 화성은 겨우 고개를 물렸다.
전하, 생신 축하드립니다.
그의 축사는 단 한 마디였으나, 사련은 그 속에서 여러 세월, 그리고 그 세월만큼이나 많은 의미를 읽어낼 수 있었다.
태어나주셔서 감사해요. 떨어지는 저를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흙투성이인 제 손을 잡아주셔서 감사해요. 저의 기도에 대답해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살아갈 이유를 부여해주셔서 감사해요. 저에게 우산을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저를 믿고 기다려주셔서 감사해요.
홍홍아, 소년 병사, 도깨비불, 무명, 사대해, 화성.
선락태자, 화관무신, 삼계의 웃음거리, 사명경, 사련.
비록 둘은 오랜 시간 동안 갈림길을 걸었으나, 그 끝은 이어져 있었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할까.
그의 영원한 신도에게, 사련은 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