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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련합작 본론페이지 위.png

1.

 

……하.

…전하!

 

전하?

사련은 제 귓가에 들리는 작은 소음에 사방을 둘러봤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칠흑같은 어둠 뿐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시야가 매우 어지러웠다. 멀미라도 하는 듯한 느낌에, 사련은 보이지 않는 자신의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뭐야? 누가 나를 부르고 있는 거야?

그 순간, 이명처럼 들리던 소리가 갑자기 사련의 귓속에 정확히 전달되었다. 그것은 매우 다급했고, 격렬했으며⎯⎯,

 

 

태자전하!

 

 

 

 

 

2.

 

그리고 그 순간 사련은 꿈에서 깨어났다. 마치 물 속에 잠겨있다가 빠져나온듯 크게 숨을 들이쉰 그가 흐릿한 눈을 몇 번 깜빡여 초점을 맞췄다. 조명은 밝지만서도 어둑한 바닥이 보였다. 의자는 덜컹거렸고, 사람들이 꽉 차 있었지만 그다지 시끄럽지는 않았다.

―다음 역은 훙취엔. 훙취엔 역입니다.

사련은 아직까지도 꿈을 꾸고 있는듯 얼굴이 멍했다. 지하철 어딘가에 달려있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방송을 그저 듣고만 있던 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훙취엔?! 훙취엔 역이라면, 그가 내려야할 곳에서 족히 4정거장은 더 지나 곳이었다. 죄송합니다, 내릴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사련이 꽉 찬 사람들 사이를 다급하게 뚫고 지나가자, 여기저기에서 짜증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훙취엔' 역에서 내린 그는 막막하게 역 한가운데에 섰다. 훙취엔은 그다지 번화한 곳이 아니라 사람이 몰리는 시간임에도 역이 한산했다. 척봐도 낡은 의자에 걸터앉은 그는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2시 7분. 이미 지각이다. 다시 4정거장을 되돌아가기까지만해도 10분은 족히 더 걸릴 것이었다. 사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운은 완전히 꽝이네.

 

" 운이 완전히 꽝이라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

 

사련은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하며 그쪽을 돌아봤다. 역의 의자는 기둥을 빙 둘러 배치되어 있었는데, 벽 너머로 쭉 뻗어져있는 긴 다리가 보였다. 그를 흘끔 쳐다본 사련은 눈을 깜박였다. 속으로 생각한 줄 알았는데, 입밖으로 말했나보다. 그는 살짝 뻘쭘하게 웃으며 기둥 너머의 그에게 대답했다.

 

" 지하철에서 잠들어서 완전히 지각해버렸네요, 하하하…. "

 

사련은 괜한 말을 꺼내 자기자신을 민망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졌다. 자신이 운이 없는 것이야 하루이틀 일이 아니고, 그런 요행에 일희일비하는 성격 또한 아니었다. 하지만 옆에서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자, 사련은 괜히 품에 안은 백팩을 한 번 고쳐안아야만 했다.

 

" 그것 안됐네요. 지하철 오려면 조금 남았는데, 음료수라도 마실래요? "

 

아까 전 사련에게 말을 붙였던 '긴 다리'의 소유자가 한 손에 캔음료를 든 채로 그에게 다가왔다. 사련은 살짝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아까 전 벽 너머로 쭉 뻗은 다리만 봤을 때도 범상치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전신을 보니 역시 범상치않은 인물이었다. 검정 티셔츠 위로 걸친 강렬한 적색의 체크남방이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가 오른쪽 눈에 두르고 있는 안대였다. 그런 그를 잠깐 쳐다보던 사련은 혹시 실례가 될까 안대쪽으로는 시선을 주지 않고 살짝 웃으며 그가 건넨 캔음료를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남자는 자연스럽게 사련의 옆에 앉았고, 사련은 기껏해야 20살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남자와 과연 자신이 이야기를 잘 이어나갈 수 있을지 잠시 걱정했었지만 그것은 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남자와의 대화는 자연스럽고 편안했다. 사련은 왠지 자신의 친지와 하는 대화보다도 편한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젠 친지라고 말할 사람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 꿈을 꿨다고? "

" 응. 아주 이상했어. 사실 꿈도 잘 꾸지 않는데 별난 일이지. "

" 내가 그쪽으로는 좀 잘 아는데. 해몽해줄까? "

 

남자는 사련의 눈에 7살이나 어린 소년이나 다름없었지만, (물론 그는 어엿한 성인이었고 누구도 그를 소년이라고 생각할리는 없었다) 그의 주도로 둘은 말을 편안하게 할 수 있었다. 눈을 살짝 반짝이는 이 어린 청년의 말을 듣던 사련은 살풋 웃으며 살짝 볼을 긁었다. 그게…….

 

" 잘 기억이 안나. 깨니까 정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더라고. "

 

사련의 말에 남자는 아쉬운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쉽네. 재밌었을텐데. 남자의 아쉬워하는 모습이 사련은 약간 귀엽게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한 마리 붉은 여우가 옆에서 꼬리를 흔드는 느낌이었다. 아마 그가 적색옷을 입고 있어서가 아닐까. 사련이 이런 종류의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 그럼 점괘라도 봐줄까? 나 그런 거 잘하는데. “

 

사련이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입꼬리를 살짝 당겨 웃어보였다. 남자는 언뜻 보면 차가운 인상이었으나, 장난스럽게 웃어보일 때면 다소… 귀여웠다. 사련은 왠지 어린 동생이 생긴 느낌에 마주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 점괘를 봐줘.

남자는 주머니 어딘가에서 나무조각 여러개를 꺼냈다. 얇은 조각들이었는데, 남자는 그것들을 한 손으로 쥔 다음 사련에게 펼쳐보였다.

 

" 이 중 마음이 이끄는 것을 고르면 돼. "

 

사련은 남자가 쥐고 있는 조각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왕 점괘를 보는 것이라면 좋은 결과가 나와야 봐주는 사람도 기분이 좋지 않을까. 혹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와 봐주는 사람이 미안해하기라도 한다면 마음이 좋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사련은 이내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내가 이런 것에서 운이 좋은 결과를 뽑은 적이 있던가? 항상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그로써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선택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사련은 이내 더 머뭇거리지 않고 한 조각을 뽑아들었다. 고민을 길게 한다고 확률이 달라지는 것도 아닐 뿐더러 남자를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 조각에 쓰여져있는 글자를 읽어줄래? "

 

남자의 말에 조각을 흘깃 쳐다본 사련은 표정이 살짝 미묘해졌다. 점괘라면, '흉'이나 '길' 따위의 운수가 적혀있는 게 아닌가? 이런 운수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기에 사련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조각을 내려다봤다.

 

" 삼랑(三郎)이라고 적혀있어. "

 

사련의 말을 들은 남자는 종전의 그와 같이 눈을 약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마치 아주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웃어댔다. 그리고 사련은 그런 그를 그저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왜? 이게 무슨 뜻인데?

 

" 그건 내 이름이야, 형. "

 

사련은 그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이 들고 있는 조각을 바라봤다. 틀림없이 삼랑(三郎)이라고 적혀있었다.

 

" 이게 네 이름이라고? "

" 난 우리집 셋째아들이라, 모두 날 삼랑이라고 불러. 재미삼아 넣어놨었지만 그걸 뽑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형은 운이 좋네. "

 

사련은 활짝 웃는 '삼랑'을 보고있자니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혹시라도 결과가 나쁜 점괘가 나오면 어쩌나 생각했는데, 다행일 뿐이었다. 삼랑이 모르게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쉰 사련은 자신이 뽑은 점괘 조각을 손에 쥐고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 '삼랑'을 뽑았으니 오늘 하루는 무척 좋을 거야. 고마워, 삼랑. "

 

사련의 말에 청년은 한참 웃던 것을 잊고 그를 바라보았다. 사련은 삼랑에게서 시선를 돌린채 지하철 전광판을 보고있었다. 역의 스피커로 전철이 곧 들어선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사련이 백팩을 바로 매고 일어설 준비를 하자, 삼랑이 그의 팔목을 부드럽게 휘어잡았다. 살짝 놀란 사련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 분명 좋은 하루가 될 거야. 난 운이 좋으니까. "

 

아까까지의 장난기 어린 웃음이 아닌, 진심이 담긴 웃음이었다. 자신을 향해 웃어보이는 삼랑에게, 사련도 마주 웃어보였다.

 

 

 

 

 

3.

 

카운터에 서있는 사련은 살짝 당황한 표정이었다. 카페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카운터로 모여있었다. 그 이유는 별로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 사람들은 정말 유별나게 잘생긴 사람이 나타나면, 홀린 듯이 그쪽을 바라보고는 했으니까. 이것은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 많은 인구 중에서 아름다운 사람의 비율을 매우 극악히 조성한 신에게 따져물을 필요가 있었다.

 

" 삼랑아, 왜 벌써 왔어? "

" 난 신경쓰지 마, 형. 시간이 남아서 조금 일찍 왔을 뿐이야. “

 

살짝 웃으며 말하는 그에, 사련은 웃어보일 수밖에 없았지만 속은 별로 웃지못하고 있었다. 신경쓰지 말라고 해도… 그의 얼굴이 어디 신경쓰지 않는다고 되는 것이던가? 이미 카페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알아챈 사련이 괜히 카페 유니폼으로 나온 모자를 한 번 고쳐쓰며 착잡한 마음을 달랬다. 신은 대체 왜 잘생긴 인구를 멸종 직전으로 만들어 이 지경을 만든건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얌전히 있을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

 

삼랑의 얼굴에는 여전히 보기좋은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사련은 어쩔 수 없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련이 몸을 숙여 자신의 쪽으로 다가오자,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있던 삼랑도 기대어 그에게로 몸을 숙여보였다. 이내 사련은 그에게 살짝 속삭였다.

 

" 일찍 끝낼게. 조금만 기다려. "

 

이렇게 속삭인 사련은 카운터에서 나서더니 동료 직원에게 무어라 말을 했다. 동료 직원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사련은 이내 스태프실로 들어가버렸다. 카운터에 기댄 채로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고있던 삼랑은 카운터에 들어선 직원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손님, 주문 도와드릴까요?

 

이 미묘한 두 사람에 대해 말해보자면, 사실 그들은 연인 관계에 있었다. 지하철에서 사련을 처음 만난 삼랑은 당돌히도 지하철에 들어선 사련에게 쪽지 하나를 건네준 채로 사라졌다. 쪽지에 적혀있던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전화번호였다. 그 위에는 '복채'라고 적혀있는 채로. 점괘를 봐준 사람이 복채까지 준다니. 그 쪽지에 적혀있는 몇 자리 숫자에, 몇날며칠을 고민하던 사련은 결국 그에게 연락을 했었다.

그 후 둘은 몇 번이나 만남을 가졌고, 그 때마다 숨길 생각을 하지 않고 돌진해오는 삼랑의 폭격과 같은 플러팅에, 사련은 결국 넘어가고야 말았다. 그렇게 애정을 확인하고 사랑을 나눈지가, 어느덧 1년이었다.

 

" 삼랑은 카페에 오지 않는 편이 좋겠어. "

 

화성과 나란히 걷던 사련은 헛기침을 하고 꽤 근엄하게 말했다. 그런 그의 말에 삼랑은 이내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살짝 허리를 구부려 사련과 눈높이를 맞췄다. 왠지 거대한 여우가 일부러 몸집을 줄이려고 하는 듯한 모양새라, 사련의 근엄한 표정은 일찍이 금이 가버렸다.

 

" 내가 뭘 잘못했을까? 삼랑은 모르겠어, 형. "

 

네가 뭘 잘못했겠어, 삼랑….

사련은 그렇게 말하고자 하는 자신의 입을 간신히 막고, 애써 시선을 피했다. 이런 식으로 넘어간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사련은 자신이 삼랑의 얼굴에 약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의 얼굴을 보지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 그런 건 아니고, 자꾸 직원들도 삼랑이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

 

삼랑이 누구냐고 물어보는 것은 직원들 뿐만이 아니다. 어쩔 때는 손님들까지 와서 물어보기 때문에 여간 대답하기 곤란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알았어, 형. 형을 곤란하게 하는 것은 싫으니까. "

 

사련이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자, 삼랑은 아까까지의 시무룩한 표정이 장난이었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사련은 마음이 놓이면서도 어딘가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마주 웃어보이며 말했다.

 

" 내가 일찍 끝내고 삼랑을 데리러 갈게. 어때? "

 

삼랑은 그가 그렇게 웃어보이자, 살짝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사련과 걸음을 맞춰 걸었다. 이 사람은, 종종 아무 준비도 되지 않은 자신을 이렇게 공격하고는 했다. 삼랑은 살짝 한숨을 내쉬어보이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

 

" 형이 날 데리러 온다니, 영광이에요. "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치며 서로 웃어보였다. 두 사람의 사이로 여름의 열기가 훅 끼치고 지나갔지만, 둘은 별로 괘념치 않았다. 마주 잡은 손에서 참을 수 없는 애정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4.

 

" 사련 선배! "

 

삼랑과 같이 길을 걷던 사련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 쪽을 바라봤다. 자신을 부른 사람을 보는 순간, 사련은 그 발랄한 목소리를 기억해냈다. 대학교 다닐 적에 같은 동아리였던 후배, 사청현이었다. 그는 친화력이 좋아 모든 선후배 동기와 사이가 좋았는데 사련과도 좋은 관계였다. 사련도 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고, 오랜만에 보는 그가 반가웠기 때문에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 청현! 이런 곳에서 보다니 우연이네요. 잘 지냈어요? "

" 잘 지냈죠! 선배야말로 잘 지내셨어요? 옆에 있는 사람은…. "

 

사청현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가자, 사련은 그제야 삼랑을 잠시 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련이 고개를 돌리자, 삼랑은 웃으며 그에게 살짝 손을 흔들어 보였다.

 

" 청현, 인사해요. 이쪽은… 큼, 내 애인, 삼랑이에요. "

 

그렇게 말하고서 사청현을 바라본 사련은 살짝 의문을 띤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청현이 깜짝 놀란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귀신이라도 본 듯한 그의 얼굴에, 사련은 진심으로 영문을 모르게 되었다. 청현?

 

" '삼랑'이라니 웃기지도 않지. "

 

사청현의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사련은 시선을 그쪽으로 옮겼다. 아까 전에는 사청현에 대한 반가움에 알아채지 못했었는데, 이제 보니 꽤 훤칠한 남자가 그의 옆에 서있었다. 온몸이 어두워서 약간 음침해보였으나, 역시 매우 준수한 인물이었다. 그는 제 뒤에 선 삼랑을 약간 노려보고 있었다.

 

" 아…. 깜짝 놀라서 경우가 없었네요. 선배, 이쪽은 제 절친 명의에요. "

" 누가 네 절친이야. "

" 에이, 왜 또 심통이 났어, 명형? 이쪽은 저번에 말씀드렸던 사련 선배, 그리고 저쪽은…. "

 

사청현은 다시 약간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 되어 시선을 피했다. 이 상황에서 혼자서 약간 어리둥절하게 된 사련은 다시 고개를 돌려 삼랑을 바라봤다. 삼랑은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저…, 저 표정 바뀌는 것 좀 봐! 명형, 봤어? 봤어?! "

" 입 좀 다물 수 없어? "

" 저기, 혹시 세 사람 아는 사이인가요? "

 

사련의 물음에 세 사람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사련은 정말 잘 몰라서 말한 것이었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자 약간 민망했다. 그가 볼을 긁자 뒤에 서있던 '삼랑'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하고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 저 이는 내 절친이지. "

 

삼랑의 말에 웃기지도 않다는 듯 하, 하고 숨을 뱉어낸 명의가 인상을 찌푸리고 그에게 말했다.

 

" 저번에 사기친 거나 물어내, 화성 이 개자식아. "

" 합의 하에 이뤄진 정당한 게임이었는데, 뭐가 억울한거지? 너야말로 빌려간 내 돈이나 갚는 건 어때? "

 

사련은 처음 들어보는 '삼랑'의 가시돋친 음성에 살짝 놀라며 눈크기를 확장시켰다. 그것보다 '화성'이라니? 화성이라면, 아무리 세상사 돌아가는 일에 어두웠던 사련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그는….

 

" 명형, 근데 그건 정말 정당한 게임이었잖아. 돈도 안 걸려있었는 걸. "

 

용호상박의 불꽃튀는 현장 사이로 사청현이 불쑥 튀오나오자 명의는 살짝 인상을 쓰며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사청현은 모르는 척하며 시선을 돌렸다.

 

" 사청현, 그걸 말이라고 해? "

" 아니…. 명형? 에이, 삐진 건 아니지? "

" 너…. “

 

명의는 이내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물어버렸고, 결국 고개를 돌리자 사청현은 익숙하게 그의 옆에 달라붙어 온갖 알랑방귀를 뀌기 시작했다.

 

" 명형명형, 우리 고기라도 먹으러 갈까? 응? "

" 또 네 형 돈 아냐? “

" 앗, 그게, 음. "

 

투닥대는 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사련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확한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어디선가 저 둘을 본 적이 있는 것만 같았다. 사련은 멍하게 사청현과 명의를 지켜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그가 웃기 시작하자, 그 자리에 있던 세 사람의 시선이 다시 모여들었다.

 

" 두 사람, 사이가 참 좋네요. "

 

사련은 왠지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몸을 돌려 화성에게로 다가간 그는 사청현과 명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 서로에게 화나는 일이 있다면 일찍 털어놓고 싸우지 말아요. 그럼 우린 갈게요! "

 

사련은 이내 그 둘을 뒤로 한채, 화성을 이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을 이끄는 그의 모습이 기분이 좋아보이자, 화성은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 형, 무슨 좋은일이라도 있어? "

 

화성의 말에 사련은 그저 웃어보였다. 글쎄, 삼랑. 왠지 그리운 기억이 떠오른 것만 같은 느낌이야. 하지만 그는 속으로만 이렇게 생각할 뿐, 소리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화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 곧 생길 것 같아서요, 화성. "

 

사련이 이렇게 말하자, '화성'의 몸이 살짝 멈칫했다가 다시 그에게로 이끌려갔다. 그는 살짝 웃음을 지어보였다.

 

" 분명 생길 거에요, 당신의 운수는 '삼랑'이니까. “

 

 

 

 

 

 

 

5.

 

그 꿈 속에서, 사련은 고귀한 태자전하이기도 했고, 신이기도 했으며, 넝마를 줍는 선인이기도 했다. 그의 긴 인생은 참 스펙터클했다. 이를 소설로 만든다면, 아주 길고 고통스러운 이야기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사련은 알았다. 그 이야기는, 무척 사랑스럽기도 할 것이며, 눈물나도록 감동적이기도 할 것이다.

이 빌어먹을 꿈, 제발 깨어났으면하는 순간도 있었고,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순간도 있었다. 이런 걸 일장춘몽이라고 하는 건가? 그렇다기에는 지금은 봄이 아닌데. 따위의 실없는 생각을, 사련은 계속해서 이어갔다. 800년이 넘는 긴 시간의 인생이, 너무도 빠르게 지나갔다.

사련은 누군가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제 손가락에는 붉은실이 묶여있었다. 이상하게도, 꿈 속에 있다보면 현실의 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이렇게 붉은 누군가를 현실에서도 사랑하고 있던 것 같은데.

 

" 전하를 지킨 것은, 제 인생의 지고무상한 영광입니다. "

 

사련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꿈을 꾸면서, 처음으로 현실에서의 일을 기억했다. 맞아, 나는 그를 사랑했었지. 바로 자신의 앞에서 은나비로 흩어지는 이 사람을.

 

 

 

 

 

 

6.

 

사련은 문득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검정색의 티셔츠를 입은 화성의 가슴팍이었다. 어젯밤, 화성의 집에서 잠깐 잠든 것을 그가 침대로 옮겨온 모양이었다. 자신을 안고 잠든 화성을, 사련은 더욱 꽉 껴안았다. 그의 느릿한 심장박동소리가 귓가에 전해져 들려왔다.

 

" 형? "

 

화성은 기민했기에, 작은 움직임에도 잠에서 잘 깨고는 했다. 그것을 뒤늦게 생각해낸 사련은 몸을 살짝 뒤로 빼며 그를 올려다봤다. 미안해, 나 때문에 깼구나. 사련의 말에 화성은 웃어보이며 고개를 작게 저었다. 두 사람은 맞닿은 시선에 서로를 잠시 응시했고, 잠시 후에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사련은 화성을 계속해서 쳐다보다가, 이내 그의 안대 쪽으로 손을 올렸다. 화성을 아무런 거부 없이, 자신의 머리를 살짝 그에게로 기울여주기까지 했다. 그들에게 빛이라고는 창밖으로 작게 넘어오는 도시의 불빛 뿐이었다. 어두운 시야로, 사련이 화성의 안대를 손가락으로 따라그렸다. 화성은 그저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얼굴을 그에게 맡겼다.

 

" 삼랑, 있잖아. 나 또 꿈을 꿨어. "

 

사련의 말에 화성은 감고 있던 눈을 떠서 그를 바라봤다. 사련은 화성의 안대 위를 배회하던 손가락을 거두고, 그의 시선을 눈에 담았다. 약간의 호기심과, 애정. 그러한 것들이 떠오른 화성의 눈동자에, 마지막으로 자신이 떠올랐다.

 

" 이번에는, 무슨 꿈인지 기억나? "

" 아니, 역시 전혀 기억나지 않아. "

 

화성은 살짝 웃음을 흘렸다. 정말 심술궂은 꿈이네. 사련은 그런 그를 따라웃었다. 그런 것 같아.

 

" 근데, 꿈을 꾸고 나면 꼭 네가 떠올라. "

 

사련의 시선은 왜인지 모르게 무척이나 애틋했다. 그전까지 사련은, 꾸고나면 기억이 나지 않는 그 꿈에 대해 무척이나 답답해했었다. 악몽인지, 길몽인지조차 알 수 없는 그 꿈을 경계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왠지 아무 상관이 없어진 기분이었다. 사련의 머릿속에는, 꿈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 우리는 아마, 전생에서도 연인이었나봐. "

 

사련은 이렇게 말을 해놓고서, 약간 부끄러워졌다. 이게 무슨 애같은 소리인지…. 전생을 운운하는 것이 약간 부끄러워서, 사련은 살짝 고개를 숙였는데, 이내 머리 위에서 들리는 화성의 웃음소리에 다시 고개를 드는 수밖에 없었다.

 

" 이번 생에서도,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

 

화성의 말에, 사련은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맞잡은 손의 온도는 올라갔고, 가까이서 나누는 심장소리는 커졌다.

화성은 사련을 바라보던 중, 갑자기 시선을 옮겨 사련의 뒤에 위치한 탁자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무드등과, 디지털 시계가 놓여있었는데, 무언가를 바라본 화성은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 생일 축하해, 형. “

 

사련은 그제서야 오늘이 무슨 날인지를 깨달았다.

7월 15일.

몇 년간 잊고 있었던 자신의 생일이었다. 사련은 살짝 멍해진 얼굴로 화성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살짝 웃었다. 새벽이었던 하늘이, 점점 붉은 빛으로 물들며 아침으로 변하고 있었다. 오늘은 왠지 기분이 좋아. 뭐든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

푹신한 침대에 누워, 화성을 입을 맞추며, 오늘 운수는 '삼랑'일 것 같다고, 사련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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