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선락태자의 생일이 돌아올 때마다, 선락국은 곳곳이 화려하게 변했다. 연분홍빛 꽃잎이 하늘을 수놓고, 사람들은 즐거운 축제의 분위기에 자연히 섞여든다. 온 나라는 풍요로운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요리를 나누고 행복을 나누고 인정을 나눴다. 하지만 그리 화려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인 선락태자는 정작 생일에 대한 감흥이 없었다. 아이의 나이를 한 손으로 셀 수 있을 땐, 매년 오는 생일이 뭐가 그리 좋은지 세어보기도 하고, 모후에게 달려가 안겨 언제쯤 생일이 오느냐 물어보기도 했다. 그런 아이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모후와 국주는 아이의 생일을 매년 성대하게 꾸몄다. 지루하지 않게 그때그때 세세한 부분을 바꾸어 아이의 눈을 즐겁게 했고, 그리하여 어린아이는 매년 같으나 다른 새로운 생일을 맞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어린 태자는 두 손으로 나이를 셀 수 있을 때가 되자, 조금 지루함을 느꼈다. 어릴 때는 마냥 거대하고 빛나 보였던 축제는 해가 지날수록 지루하게 다가왔고, 새로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태자가 두 손으로 자신의 나이를 셀 수 없게 되자, 그는 축제를 구경하는 것 대신 수련하여 수양을 쌓았다. 그는 정도를 걸어가면서, 세상에 이치를 배웠다. 그러나 그는 어리석게도 ‘창생을 구하겠어!’라고 말하는 이상만을 좇는 이로 변해갔다.
누군가가 태자의 말을 듣는다면, 얼토당토아니한 말을 한다며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금지옥엽의 태자 전하였다. 어느 누가 그의 말에 딴지를 걸 수 있겠는가. 국사의 말조차 듣지 않은 어리석은 태자에게 누가 그의 말을 정정해주겠는가.
이러한 태자 전하는 열일곱이 되던 해, 등선하여 신이 되었다. 많은 이들에게 추앙받는 무신이 되었다. 더더욱 그의 말을 정정해줄 이는 사라져갔다. 그가 등선하였다 해서 매년 돌아오는 생일이 사라지지 않는다. 신이 태어난 날이라니, 얼마나 성스러운 날인가. 국주는 여전히 성대한 축제를 열었고 나라는 떠들썩하게 변해갔다. 하지만 그것과는 달리, 속은 차차 곪아 진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태자가 점차 나이를 먹을수록, 그는 자신을 돌볼 여유가 사라져 스스로에 대해 무관심해졌다. 자신에 대해 소홀해질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가 내뱉었던 말을 착실히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때나 상관없이 기원을 받고, 신도들의 소원을 이루어주고, 일하며, 남을 돕기에도 버거워, 그것들과 반대되는 자신을 버린 것이다. 그는 그러한 사람이었다.
태자가 등선한 뒤 세 번의 해가 지나자, 태자의 나라에선 반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반란을 저지하기 위해 태자는 인간 세상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태자가 나섰기에, 나라가 멸망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내려온 태자를 원망했다. 신은 전지전능하랴 믿었던 이들의 믿음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태자는 폄적 당해 인간 세상에 떨어졌다.
*
사련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간밤에 자세가 불편하였는지 등이 딱딱하게 배겼다. 하지만 그는 일어나자마자 깜짝 놀라 그 자리에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일어난 곳은 그가 잠들었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숲이 우거져 있는 숲 그가 왜 잠을 청하겠는가? 눈앞에 펼쳐진 숲과 그가 방금까지 배고 있었던 쓰러진 나무토막은 이곳이 어떠한 숲이란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의 명석한 두뇌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분명 잠에 들기 전까지 그의 옆에는 그의 ‘삼랑’이 있었고, 잠든 곳은 극락방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러한 숲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떤 귀의 소행일까, 사실 이 말도 맞지 않았는데, 어떤 간 큰 귀신이 무려 절경귀왕 옆에 잠든 신관을 습격하겠는가. 하물며 귀시장에서 소문난 ‘작은아버지’인데, 그럴만한 귀신은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 자연히 귀신에 대한 것은 지워버리고, 다른 것을 생각해보아도 글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상천정은 아직도 정신없이 바쁘기 때문에, 그에게 간계를 부릴 만큼 여유롭지 않을 터이다.
그럼 도대체 누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사련이 서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누군가가 마른 나뭇잎과 가지를 밟는 소리가 났다. 그것들이 밟혀 버석대는 소리는 곰곰이 생각에 빠져있던 그를 끌고 나오기 충분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수많은 해를 함께 보낸 익숙한 얼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사련은 자연히 손을 그쪽으로 뻗었다.
“풍신? 너 왜 여기….”
하지만 그는 그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그를 지나쳐 길을 걸어갔다. 사련은 조금 당황했다. 그가 자신을 보지 못할 거리가 아니었는데, 어째서 그대로 자신을 스치고 지나간 것인지. 그는 자신을 스치고 지나간 풍신이 무언가 사정이 있기 때문에 스쳐 지나간 것으로 생각하고, 그가 지나간 길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풍신이 지나간 길 역시 산길이었는데, 여러 번 사람이 다닌 흔적이 있어, 그 길만 나뭇잎이나 가지가 치워져 있었다. 사람이 밟아 만들어둔 길은 쉽게 잊히지 않는 편이어서, 아무리 그가 앞서나갔다 할지라도 그는 풍신이 지난 길을 따라 걸어갈 수 있었다. 찬찬히 그가 만든 길을 따라 걷자, 어느 집이 나왔다. 그 집은 그리 잘 만든 집은 아니었으나 비바람을 막아주고 살아가기에 있어선 꽤 안락해 보였다. 사련은 이 집을 보자, 풍신이 이곳에 들어갔나 싶어 마당을 가로질러 그 안으로 들어갔다.
곳곳에 사람의 흔적이 묻어있었으나 결코 오래된 흔적은 아니었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사련은 나온 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침음을 흘렸다.
“…모후?”
나온 이는 사련을 낳아주고 사랑해준, 모후였다. 그는 조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모후는 분명 팔백 년 전… 사련은 이내 아까 그가 발견했던 풍신을 떠올렸다. 어딘가 급히 걸어가던 풍신, 그리고 모후… 이 두 사람으로 인해 그는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선락국이 멸망한 이후, 모후와 국주, 충신이었던 이들과 그가 살았던 집 아닌가. 사련은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히 이 일은 팔백 년도 더 된 일일 텐데, 어째서 그의 눈앞에 다시 펼쳐지게 된 것인지? 사련은 가늘게 눈을 떴다. 그때, 모정은 부엌에서 나와 방 밖으로 나온 모후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왜 나오셨습니까?”
“오늘 황아의 생일이라, 장수면을 만들려고.”
사련은 모후의 말에 조금 놀랐다. 생각해보니 사련이 수련을 한다며 떠나있던 사이, 그의 생일이 지났었다. 그 사이에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일부러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그가 없던 사이에도 그녀가 제 아들을 챙길 것이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사련은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었다. 모정은 이미 그녀의 요리 실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들어가 계시라 권했지만, 모후는 끝끝내 부엌에 발을 들여놓고 만들기 시작했다.
모후는 요리가 참으로 서툴렀다. 평생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아온 이지만, 그것은 모두 선락국이 부흥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 손으로 면을 뽑는 모습은 엉성했다. 장수면의 면을 뽑다가도 중간에 끊어먹기 일쑤였고, 평생을 먹어만 오던 음식을 떠올리며 만들었으니 맛을 보장할 수조차 없었다. 당연히 결과물도 엉성했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만들었다. 모양이 엉성하든 말든, 손이 얼마나 망가지든 말든 끈질기게 만들었다. 그릇에 담긴 장수면은 그 의미에서 벗어나 이리저리 끊겨있었고, 국물이나 고명도 어린아이가 만든 것처럼 어색했지만 그녀는 그것을 보고 작게 웃었다. 고운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 미소를 보자마자, 사련은 할 말을 잊어버렸다. 어딘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그것을 조용히 응시했다. 다 잊었다, 무뎌졌다고 생각했던 것이 견고한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느낌이었다. 점점 흐려지는 그 광경에 사련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깨달았다. 이것은 모두 꿈이었구나, 하고.
*
“….”
깊은 잠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그가 서서히 눈을 떴다. 선명하진 않을지언정, 흐릿하지 않은 오랜 꿈은 가라앉았던 감정을 달래 깨우기 쉬웠다. 사련은 오랜만에 무언가 공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가 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사련은 허공을 응시하며 눈을 여럿 깜빡였다. 그리고 이때, 사련의 목덜미 옆으로 익숙한 팔이 나와 그의 목을 감쌌다. 허공을 응시하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귓가에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렸다. 사련은 찬찬히 몸을 돌려, 그를 감싼 팔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장인이 세심하게 깎아놓은 것 같은 미모는 오늘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련은 그 조각 같은 미모를 한 손을 천천히 올려 만졌다. 날렵한 턱선과 높은 콧대, 유하게 풀어진 눈썹과 평소보다 유해졌다 한들 날카로운 눈매. 그는 하나하나 세심하게 그것들을 짚어나갔다. 그 미모를 가진 이의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화성은 그의 얼굴을 세심하게 쓸고 있는 사련을 바라보다가, 살며시 입을 열었다.
“형, 형이 보기에 삼랑의 얼굴은 어떤 거 같아?”
아름다운 미성으로 짓궂은 질문을 던지는 이는 참 얄밉기도 했다. 덤으로 이마에 내려앉는 입술까지도.
“…삼랑!”
어쩐지 얼굴이 화끈해지는 느낌이었다. 화성은 그의 반응을 보고 얄궂게 웃었다. 어쩐지 온몸에 모든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화성은 평소와 다른 그를 눈치채었는 지, 약간 표정이 가라앉았다. 남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미묘한 변화라 사련이라 할지라도 그의 조금 달라진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가 사련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형, 무슨 일 있어? 가슴에 무거운 쇳덩이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느낌은 수십 번 닳았던 종류라, 사련은 아무런 내색하지 않고 그에게 대답했다.
“아무일도 없었어.”
“형이 그렇다면, 삼랑은 그런 거라고 믿을게.”
아주 짧은 정적이 그들 사이로 내려앉았다. 이 사이에 흐르는 감정은 무엇일까, 오랜만에 본 이에 대한 울렁거림? 그리움? 그것도 아니면 무뎌져 닳아버린 부스러기일지. 사련은 그것을 무어라 정의내리지 않았다. 화성은 조용히 사련을 내려다보곤,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생일 축하해, 형.”
사련은 작게 웃었다.
“고마워, 삼랑.”
예전을 그리워하기엔, 앞으로 둘이 만들어갈 미래는 너무나도 많이 남았다. 사련은 그가 알지 못했던 예전의 사건을 가슴 속에 조용히 묻었다. 이제 앞으로 지낼 그의 생일은, 옆에 있는 ‘삼랑’이 수백 번 챙겨줄 것이다. 언젠가 그 둘이 사라지기 전까지, 아니면 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삼랑은 그의 생일을 챙겨줄지도 모른다. 사련은 따스한 그의 말을 들으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