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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련합작 본론페이지 위.png

“삼랑은 요새 밤에 잠을 못 자.”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있어 경사 소식을 전하듯 했지만, 단어는 긍정적이지 않았다. 지나가듯 툭 내던진 말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라는 뜻이 내포되어있었지만 사련은 눈썹을 내리깔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화성의 볼을 한 손으로 감쌌다. 흠, 귀왕도 잠을 설치나? 와 같은 생뚱맞은 의문이 들었지만, 그것은 둘째치고, 사련은 삼랑이 잠 못 이루는 것만이 마냥 걱정스러웠다. 무슨 일인지 재촉하듯 입으로 꺼내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는 염려 섞인 눈빛을 보자 화성은 괜찮다며 사련의 이마와 코, 입술에 천천히 입 맞추어갔다. 날카로운 눈매는 둥글게 휘어져 눈동자는 별처럼 빛나 그의 남편을 담고 있었고, 입가에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곧 있으면 형의 생일이잖아. 어떤 멋진 추억을 선물해줄지 고민이라 삼랑은 밤에 잠이 안 와.”

 

“삼랑도 참.”

 

안도감에서 변한 실없는 웃음이 얼굴을 가득 채웠지만 그래도 얼굴 한쪽에 그늘진 염려스러운 기색은 가시질 않았다. 그래도, 잠을 못 이룰 정도가 되면 안 되지. 둘은 서로의 몸을 더욱더 가깝게 끌어당겼고, 오래 지나지 않아 서로의 몸에서 전해진 따스한 열기가 오갔다. 사련의 속눈썹이 몇 번 깜빡이고, 이어졌던 둘 사이의 간극은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많이 안 바래. 아니,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800년 동안 바라오던 것인데. 라는 말은 조용히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화성의 안색은 미동이 없었으나,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깊고 슬픈 감정과 사랑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사련은 그의 눈을 마주했다. 정말, 사실 선물 같은 건...

여름밤의 한기가 이불 속으로 전해져오는 것만 같아 사련은 몸을 꼬물거리며 화성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기분 좋은 숨소리가 사련의 이마에 스쳐 어쩐지 간질간질한 느낌에 사련은 이마를 몇 번 매만지다가 또박또박 말했다.

 

"그래도 난 진심이야."

 

화성이 돌아온 지 1년이 슬슬 되어간다. 사련은 생각했다. 그가 없는 화려하고 찬란한 연회보다도 화성과 자신이 함께 있는 한,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고 궁상맞은 자리조차 사련은 만족할 거라고.

그러나 이 생각을 입 밖으로 술술 내뱉기엔 조금, 부끄러웠다.

 

"오늘 시장에서 봤던 공연이라던가, 그런 것도 재미있었고... 좋았어."

 

화성은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화성과 잠시간 마주치자, 사련은 재빠르게 말을 돌렸다.

 

"하필 선락에 대한 공연이라니. 전부 잊혀졌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아무리 고대 국가라도, 지금은 너무 구닥다리 이야기가 아닐까."

 

"그렇게도 보일까? 하지만 그만큼 아름다웠던 것들에 대한, 향수라던가. 추억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럴까. 사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야기를 다시금 천천히 떠올렸다. 사련은 그 연극을 알고 있었다. 생일을 맞은 선락국 금지옥엽에 관한 이야기다. 지금의 자신은 아니지만, 과거에 그는 확실히 선락국의 금지옥엽이었고, 조만간 생일을 맞을 예정이었다. 사련의 모후는 아주 옛날, 그를 무릎에 앉히고 이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왜 잊고 있었지?

 

연극에서는 아주 그리운 냄새가 났다. 누구도 기억할 수 없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사련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그것은 마치 아무도 없는 세계가 하나 창조된 것과도 유사한 감각을 가져다주었고 동시에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지금 사련이 사는 마을은 옛 선락국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왜일까, 이 낯설고도 익숙한 곳에서 오래전 사라져버린 추억을 다시금 꺼내 볼 수 있게 되다니.

 

참으로 이상한 감각이었다.

 

이번에는 사련이 아닌 화성이 말을 돌렸다. 그러는 바람에 사련은 한참 동안 파고들어야 했을 우울의 구덩이에서 잠시나마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형은 어릴 적 생일을 어떻게 보냈어?"

 

화제 전환의 이유만으로 질문한 것은 아니었다. 장담하건대 자신의 경험을 내세워봤자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 만만하며, 화성의 기호보다 사련의 취향을 따르는 것이 더욱더 합리적이고 좋은 추억을 만들어 줄 수 있으리라. 사련은 대답을 바로 잇지 않았지만, 화성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어릴 적 생일은 즐거웠어."

 

"오."

 

간결하지만 모든 것을 담은 말에 짧게 탄성 한 화성은 웃음을 흘렸다. 사련은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연회장의 모양, 사람들의 수, 선락국 특유의 장식과 모형들, 모든 것들을 유려하게 설명하여 듣는 이의 머릿속에 휘황찬란한 선락의 황궁이 눈 앞에 펼쳐진 듯했다. 사련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부황과 모후가 항상 각지에서 사들인 보석과 법보를 안겨주시고, 사람들은 웃으며 내 탄생을 축하해주고…. 그 후로는 아무도 챙겨주지 않아서 신당에 내 자신을 얹어놓듯 나 자신을 위해서 생일이 생각날 때면 축하하곤 한 게 다지만, 하하!"

 

화성의 얼굴이 조용한 침묵으로 물들어갔다. 아련히 물든 슬픔은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았다. 화성은 쉬이 동정이나 연민의 낯을 드러내어 사련의 삶을 재단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제멋대로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어쩌겠는가. 화성의 표정을 보았는지 사련이 애써 장난스럽게 목소리를 올렸다.

 

"아잇, 삼랑! 정말 나는 괜찮았어! 앞으로 챙겨나갈 생일이 많은데, 그것 몇 번 좀 못했다고!"

 

그렇지, 내가 챙기면 되지. 화성은 마음 한켠이 시큰해졌으나 사련과 함께한 후로 좋고 밝은 미래만을 상상하는 습관이 생겨 우울한 생각은 저편으로 밀어버린 지 오래였으나, 어쩐지 사련의 반응이 재미있어 조금 더 우울함에 잠겨보기로 했다.

 

"으음, 그렇지만."

 

말꼬리를 길게 늘인다. 눈을 내리깔았다. 좋아. 귀시장의 귀신들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히 이 정도면 길가는 웬만한 요마귀괴는 순식간에 홀려버리겠습니다요! 라고 단박에 소리칠 정도로, 솜씨가 대단한 화가가 평생의 걸작을 만들었다 해도 이보다 더 대단하지 않은 외모로 우수에 잠긴 애처로운 미인이라는 표제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었다. 사실, 이 정도까지 오면 슬픈 건 둘째치고 화성은 사련에게 장난치려는 생각만이 만만했다.

 

"게다가…. 게다가..."

 

"게다가?"

 

"내 생일은 항상 삼랑이 챙겨줄 거잖아!"

 

정적.

화성은 눈이 동그랗게 뜨여 몇 번 어리벙벙하게 깜빡이다 이내 조용히 노래 부르던 부엉이가 나무에서 펄쩍 날아오를 정도로 큰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동안의 폭소가 잦아들고 슬슬 아려오는 배를 쓰다듬으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치며 화성은 웃음기가 섞인 채로 말했다.

 

"그래, 형이 원한다면, 앞으로 몇백 번이고, 몇천 번이고, 형의 생일에 장명등과 연극을 올릴게. 이건 가장 충성스러운 신도의 맹세랍니다."

 

아, 그래도 말하건대 전하의 생일은 지금 있어서 가장 소중한 날이니 제가 고민하는 것을 전하께서 알아주셔야 해요.

 

"삼랑이랑 같이 하는 모든 게, 나한테는 정말로 소중하고 좋아. 힘들고 고된 일이라도 삼랑이 옆에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아니, 괜찮을 거야."

 

아까는 부끄러워 전하지 못했던 말이 불시에 저도 모르게 나와버렸다. 화성은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사련은 차라리 그가 평소처럼 웃으며 눅진눅진한 애정표현을 하는 것이 지금 더 부끄럽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사련의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며 그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향할 곳 없이 데굴데굴 이리 구르고 저리 굴렀다.

 

팔을 뻗어 화성은 자신의 연인을 더욱더 가깝게 끌어안았다. 천천히, 사련의 머리카락과 뒷목에 천천히 입을 맞추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아,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오래지 않아 사련이 잠에 들고, 숨소리가 점점 일정해지며 작은 풀벌레와 새소리가 귓가에 스치는 것이 전부였을 때, 화성은 슬며시 몸을 뒤척여 바로 누운 사련의 옆얼굴을 조용히 응시했다. 이름을 부르면 혹시 단잠에 방해가 될까, 불러보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그는 조용히 목구멍 안에서 이름을 굴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밤의 모든 것들이 죽음과도 같은 잠에 빠져들었을 때 별과도 같은 반짝이는 눈은 단 한 사람만을 비췄다. 어둠이 화성의 얼굴로 흘러내렸다.

 

사련은 숨겼고, 숨겼다고 생각했겠지만 사련이 부황과 모후와 같은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단순히 그리워하는 이를 추도하거나 과거를 추억하는 낯이 아닌, 무언가 더욱더 어둡고 슬픈 심연과도 같은 빛임을 화성은 알고 있었다. 화성은 선락국의 마지막 국주가 정확히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알지 못한다. 사련을 800년 동안 쫓아왔다 해도, 그는 자신의 신에 대한 모든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련도 그에게 아직 말해주지 않았고, 화성도 그가 평생 사실을 숨기려 한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의 손을 잡고 그저 행복한 나날만을 상상하게 해주리라고 마음먹었다. 가장 깊은 곳을 터놓는 행위가 곧 신뢰의 척도는 아니었고, 그가 알지 못하는 부분을 평생 모르는 채로 살아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한 거짓말이었지만,

화성은 사련의 고통스러움을 숨기려 하는 듯한 무덤덤한 얼굴이 가장 보기 힘겨웠다.

 

당신은 내가 모르는 어떤 길을 걸어온 걸까?

나는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과연,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

 

 

화성은 낯선 곳에서 눈을 떴다.

어두운 공간에 있던 눈이 밝은 빛에 적응하기도 전에 들리는 함성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가장 기본적인 감각인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것으로 상황을 알기 전에 다가오는 것이 있었다.

코에 스치는 그리운 향기.

단 한 순간 그를 스쳐 지나갔지만 일평생이 되도록 그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선락?"

 

저도 모르게 입에서 오래된 이름이 떠돌았다. 아니, 아니다. 이곳은 화성이 전혀 알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자리한 지금, 화성의 뇌리 깊은 곳에 잠겨있던 감각들이 일제히 풀려나 나뭇잎을 산산히 흔드는 바람처럼 온몸을 덮치는 듯했다. 태어나 이 땅의 먼지와 모래바람을 마시고 자란 다부진 아이는 너무나도 익숙해진 향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억겁의 세월이 지나 돌아온 것일까, 생면부지의 장소인데도 불구하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감각이 샘물처럼 퐁퐁 솟아올랐다.

 

"대답하라!"

 

남자 목소리? 화성은 몸을 뒷쪽으로 돌렸다. 붉은 옷 도포가 잔잔히 흔들리고, 화성의 눈앞에 보인 것은, 수많은 관중이 각각 저마다의 표정을 뒤집어쓴 채로 자신에게 동공을 집중시킨 모습이었다. 화성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 박자 뜸을 들여 입을 천천히 열었다.

 

"무엇에 대한 정답을 말하는 거냐?"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눈알을 데룩 까뒤집더니-화성 주는 이 사람이 자신이 재수 없어 하는 누군가와 아주 유사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퉁명스러운 어조로 내뱉었다. 그는 발을 탁탁거리며 대답을 재촉했다.

 

"마음 가운데서 우러나온 진심은 무엇인가, 에 대한 답이다!"

 

생각하는 기미도 없이 화성은 입을 떼었다.

 

"답은 충성이다."

*忠(충성 충) 자는 마음(心) 가운데서(中) 우러나온 것이다.

 

"정답이오!"

 

일개 병사로 보이는 남자가 손을 높이 들며 선포하자 온 좌중이 함성을 지르는 광경에도 화성은 압도되지 않았다. 귀 왕은 꿈에서도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는다. 꿈을 꿀 필요도 없지만, 꿈을 꾸게 된다면 꿈의 모든 것을 조절할 수는 없더래도 현실과 몽상의 경계에서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는 주도권 정도는 가지는 것이다.

 

"수수께끼는 하나가 남았소! 전하의 생일이 지나기 전, 이 답을 맞히면..."

 

 풍경은 그에게 너무나도 익숙하며, 익숙하지 않다. 어디서 보았더라? 곰곰이 생각하려 해도 시끄럽게 울려대는 북과 징, 사람들의 함성에 화성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대는 이 나라의 보물과 결혼을 하게 될 것이오!!!"

 

"허어?"

 

나 원참. 이건 또 무슨 수작질이지?

그러던 와중 화성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실이 있었다.

 

"설마..."

 

그의 목소리는 거대한 웅성거림의 파도에 의해 금세 묻혔다. 휘황찬란한 건물의 작은 창 너머로 작은 인영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거대한 해협의 물결처럼 요동쳤다.

 

"오오! 저기 위를 봐!"

 

사람이 개미처럼 보일 만큼 높고 견고해 보이는 황궁의 발코니 위로 화려하게 치장한 사람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금빛 장식과 검은 머리칼이 물결쳤고, 멀리서도 그의 선풍도골함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달빛조차 그보다 더욱더 초라하고 보잘것없었다.

 

"태자 전하시다!!!"

 

눈을 들어 마주한 사람은, 화성이 너무나도 잘 아는 얼굴을 쏙 빼닮아 있었다. 수많은 사람의 웅성거림은 존재하지 않았던 듯 적막해졌고 오직 세상에서 화성과 그 사람만이 있는 것처럼, 눈이 마주쳤다. 화성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전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이 보제관에서 비단 삼랑만이 잠 못 이루는 이가 아니었다.

사련 또한 그랬다.

 

이것은 결코 흔한 불면증이 아니다. 그는 800년간 그 어떠한 불편한 장소에서라도 잠자리에 들 수 있게끔 단련되었으며, 심지어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벽돌 위나 쓰레기더미 사이에서 잠들어도 끄떡없이 다음 날 눈을 뜰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그를 잠 못 이루게 하는 것은 잠자리가 얼마나 편하고 아늑한지에 달리지 않았다. 잠 못 이루는 밤은, 그가 길을 빌려 선락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는 날이었다.

 

낮에 그런 공연을 봐서 그런 걸까? 사련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저 깊이 묻혔던 기억들이 예상치도 못하게 파헤쳐져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이미 말라비틀어져 꼬깃꼬깃해진, 빛바랜 추억들이었다. 낮에 보았던 조잡한 연극들은 선락의 이야기를 그대로 빼닮았다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었지만, 가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향수를 깨우기엔 충분했다.

 

무언가 고민이 있어? 삼랑은 말했다. 그러나 어떻게 말할 수 있었을까? 이 아늑한 장소에서 오래된 기억의 파편들이 나를 급습하고 있다고?

설마. 어떻게 말할 수 있어?

그저 조용히 내일을 기다리는 수밖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로 사련은 잠을 청했다.

 

오늘도 선락에 대한 꿈을 꿀까? 라는 예상이 무색하지 않게 오랜 세월 형태를 유지해온 변하지 않는 풀벌레와 바람 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았다 자신도 모르게 떠보니, 사련은 더 이상 보제관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꿈인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그는 자연스레 깨달으며 별다른 의구심도 없이 화려하게 치장된 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800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는 역사서의 한 편 속에서만 간단한 몇 마디 문장으로 찾아볼 수 있는, 선락의 구조물들과 화려한 장식들…. 으아, 망가질까 겁나라. 사련은 발을 동동 구르며 진저리를 쳤다.

 

"정답이오!"

 

사련이 발걸음을 옮기자,...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하늘 아래, 수천 개의 등으로 밝혀진 선락황궁의 안뜰에 서 있는 여러 사람과 그 가운데 빈 곳에 덩그러니 허름한 옷을 입고 서 있는 준수한 외모의 청년이 서 있었다.

 

이게 뭐야?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경악과 혼돈을 애써 갈무리하고 사련은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곳은 귀족의 방이라기엔 사치스럽고 동떨어졌다. 선락 황 친족들의 방인가. 여름 밤하늘은 이미 깊은 밤에 물들어있었으나 거대한 사람의 인파는 물러갈 줄을 몰랐다. 저 아래서 경비병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저 사람은 풍신과 조금 닮아있었다-울려 퍼져왔다.

 

"그대는 두 번째 정답을 맞췄소!!"

 

어라, 이 진행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사련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트인 발코니 사이 장막에 몸을 감추고 귀를 기울이며 생각했다. 창의 바깥에서 경비병이 두 번째 수수께끼의 정답과 혼인에 대한 사실을 늘어놓자 사련은 자신의 추리를 확신했다. 아이고, 이건....

 

사련이 장막을 걷어냈다. 한 걸음, 한걸음 반복하여 걸어가니 밤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진 탁 트인 전경이 보인다. 사련에게는 가장 낯설고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이 꿈은 방금 전만 해도 화성과 이야기했던, 길거리의 싸구려 염정 소설의 연극과 내용이 흡사했다. 다름 아닌 고대 선락을 배경으로 하는.

 

.

.

.

이야기는 대략 이렇게 시작한다.

 

사련이 태어나기도 전, 황금기를 맞던 선락에는 금지옥엽으로 자란 공주가 있었다. 그는 대단한 미인으로 여러 나라에서 혼인 요청이 들어올 정도였다.

그러나 공주는 우울해했다.

아버지가 성을 내고 눈물을 흘려도 공주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시집을 가고 싶지 않아, 그는 꾀를 한가지 썼다. 어느 날 공주가 국주에게 말했다.

나는 내 남편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3개의 수수께끼를 내겠어요. 수수께끼를 맞추는 사람이 있다면, 그와 기꺼이 결혼하겠어요. 그러나, 그가 한 문제라도 틀린다면!

공주의 붉은 입술이 깨물려 붉은 피가 아무도 모르게 흘러내린다.

 

그의 머리를 내 발아래에 내려놓아야 할 거예요!

 

이 뒤의 이야기가 어떻게 되더라. 곰곰이 생각하던 사련은 뒷부분을 기억해냈다. 선락의 아리따운 공주는 생일을 맞은 날 찾아온 허름한 청년이 수수께끼 3개를 맞추자...

 

어떻게 됐더라.

 

발치 아래의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되자, 사련은 곤란하게 몇번 웃음짓곤 기지를 발휘하여 자신이 공주가 된 마냥 높은 곳에 서서 고고한 자태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 그 웃음은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게 낯설지 않은 얼굴을 보고, 괴기하게 비틀려 굳어버렸다.

 

어떻게 그가 여기에 있을 수 있지?

그 사람은, 사련이 너무나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잘 알기만 하겠는가! 당장 아까만 해도 저 얼굴과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는데!

 

"전하?"

 

이게 무슨 장난이야!

 

"삼랑?"

 

 

*

 

선락의 아리따운 공주는 생일을 맞은 날 허름한 청년이 수수께끼 2개를 맞추자, 수수께끼를 맞췄더라도 결혼하기 싫어했던 공주가 일전에 경비병들에게 명해둔 덕에 청년은 그대로...

슥삭!

 

화성과 경비병들의 눈이 마주치고, 정적이 이어졌다.

 

1,

 

2,

 

3.

 

 

"저놈 잡아라!!!"

 

모정, 아니, 경비병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 뒤로 펼쳐진 광경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 잡아볼 수 있으면 잡아봐라, 멍청이들아!>

 

수많은 인파는 화성이 지나가는 대로 흩어지며 마치 희극처럼 경비병이 쫓아올 때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선다든가, 경비병들의 다리를 걸고넘어진다던가 하여 화성은 금세 많은 군중의 물결 사이로 자취를 감추었고, 꼴사납게 겹겹이 쌓인 벽돌처럼 넘어진 경비병들-모정과 풍신을 닮은-만이 분이 넘치는 고함을 지르며 복수를 다짐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래에서 무언가 이야기하는듯하다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흩어지고, 두 경비병만이 황궁으로 들어왔다. 어디로 간 거지? 라고 중얼거리기도 잠시, 사련이 있던 방문 너머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보고드립니다."

 

어쩌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사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를 택했다. 경비병은 사나운 표정으로 다가와 사련은 경계태세를 갖추었으나 경비병은 사련의 생각과 달리 그의 앞에 무릎을 쿵 꿇었다. 소리에 놀란 사련이 손을 내저으며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났다. 

 

"전하! 그놈을 잡아 오려 했으나 워낙에 재빨라, 놓치고 말았습니다! 부디 벌해주십시오!"

 

"아, 아녜요…. 됐어요. 괜찮습니다."

 

사련은 경비병을 벌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권한이 있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그보다 의식이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는 꿈-꿈일까? 현실이라기에는 몽롱했고 꿈이라기엔 너무 사실적이었다-은 어째서 염정소설이 배경이며, 그 한복판에 자신이 왜 있는지, 자신의 꿈에 삼랑이 나오는 건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다 쳐도 어떻게 그렇게 사실적인 인물처럼 행동하는지 등등…. 고민할게 너무 많았다. 그러나 혼자 생각할 공간을 주길 바라는 사련의 마음과는 달리 경비병들은 어두운 얼굴로 물러날 줄을 몰랐다.

 

"전하의 탄신일에 이런 불미스러운 사고가 일어나다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송구합니다."

 

처벌을 바라는 듯 고개를 푹 숙인 경비병을 어찌 돌아가게 할까, 고민하던 중 그의 뒤로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병졸 하나가 숙였던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아, 그놈이 남긴 쪽지가 있었는데... 이것이, ..."

 

경비병은 삐질삐질 흐르는 땀을 누런 손수건으로 훔치며 입을 어물거렸다. 경비병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으나, 사련은 '그놈이 남긴 쪽지'라는 말에 사정의 반절은 알았다는 듯 속으로 곤란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 이것이... 아무래도 비밀 암호인 것 같습니다만, 몇 번을 보아도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알 수 없으니…. 송구합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종이에는 괴발개발 한 모양새로 그림인지 글씨인지 알 수 없는 꼬불꼬불한 선들이 그려져 있었다.

사련은 어색하게 웃었다.

 

'이걸...'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무릎을 꿇고 비는 사람들 사이로 사련은 그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어쩌면 좋지...'

 

*

이추 - 화련은 잠 못 이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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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들썩한 연회를 뒤로하고 사련은 탁 트인 황궁의 정자 근처로 도망쳐왔다. 꽤 오랫동안 뛰었으나 숨도 몰아쉬지 않는 체력은 언제나 도움이 되었으나, 오랜만에 걸친 선락 황친의 화려하지만 묵직한 금빛 장신구들과 비단 옷감은 사련의 생각보다 꽤나 걸리적거렸다.

 

'역시 삿갓 하나로 충분하다니까...'

 

겉모습보단 내면이 중요하다는 선인들의 말씀은 역시 틀린 것이 없다. 주위를 슥슥 둘러보고는 쫓아오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사련은 머리에 쓴 무거운 관과 어깨 장식을 조심스레 떼어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외진 곳에서 무얼 하시는지요?

 

어?

 

사련이 고개를 들자 이마에서 환히 빛나는 단사가 눈에 띄었다. 평소의 수수하고 우아한 모습과는 달리 은은한 눈화장과 붉은 입술, 그리고 고운 비단으로 치장된 사련은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화성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휘어지듯 웃으며 능청스레 말을 이었다.

 

“오, 이 연회의 주인공이신가 보군요.”

 

사련은 못 말린다는 듯 웃었지만, 금세 화성의 장단에 맞춰주었다. 그는 고아한 공자처럼 기침하며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공자는 왜 여기 계시나요? 연회가 즐겁지 않나요?

 

“저는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으니 곧 만날 수 있겠네요.“

 

화성의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휘자 사련은 끄응, 소리를 냈다. 양 볼이 그의 어깨에 걸쳐진 붉은 비단 망토보다도 더욱 더 붉었다. 이 정도면 놀아주는건 됐지? 사련이 허리에 손을 얹고 꾸짖자, 조용히 지켜보던 화성은 소리 내 웃으며 묵묵히 사련의 투정 어린 잔소리를 들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사련이 진정되자, 화성은 태연스레 웃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밝은 달이 그들의 머리 위에 떠, 엷은 빛이 서늘하게 화성을 비추었다.

 

"쪽지를 보고 잘 찾아와줬네, 형?"

 

"삼랑...차라리 그림을 그려놓지 그랬어?"

 

"하지만 그랬다간 사람들이 알아챌 것 같아서."

 

내 글씨를 알아볼 사람은 세상 천지간에 형밖에 없을 걸. 화성을 말했다. 사련은 억울해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지금 바로 화성의 천인공노할 서예 솜씨를 지적할 수도 없었고, 쓸데없는 다툼은 이 상황을 타개하는 데 일절 도움이 되지 않았다. 화성은 그저 싱글벙글 웃고 있었고, 사련은 한숨을 내쉬며 화성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삼랑, 삼랑은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화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삼랑이 감히 추측하건대, 이곳은 꿈속인 것 같아."

 

"누구의?"

 

"엄밀히 말하면 이건 누구의 꿈도 아니지만, 꿈의 두 번째 매개체는 형이니까 형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나."

 

삼랑이 나긋하게 말하자 사련은 잠시 곰곰이 고민하더니 이내 무언가 떠올린 듯 손가락을 튕겼다.

 

"기억을 훔치는 벌레…. 인가?"

 

"맞아. 형은 역시 똑똑헤."

 

기억을 훔치는 벌레. 말 그대로 두 사람을 잡아 서로의 꿈에 가두고 둘 중 한 사람의 기억을 먹는다. 그러나 벌레는 사람의 기억을 훔쳐 그대로 먹지 않고, 희생양과 놀이를 한다. 두 명의 희생양 중, 숙주의 추억을 깊은 곳에 숨긴 후에 숙주 본인이 그 기억을 찾아낸다면 꿈에서 무사히 깨어날 수 있으나, 찾지 못한 채로 날이 샌다면 그대로 먹혀버려, 꿈에서 깨어나도 몸은 텅 빈 껍질이 되어 지나가던 귀신이 채가거나 그대로 썩어 없어지는 운명이 된다.

 

"미안, 삼랑까지 휘말리게 해버렸네..."

 

"형의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어쩌다가 이놈이 형을 먹잇감으로 삼은 걸까? 주제도 모르고."

 

얼굴에 스산한 한기가 서렸다. 하지만 사련은 워낙에 운이 없었기에 예전에도 지나가던 잡귀가 씌거나 함정에 당하는 일이 잦아-물론 화성이 돌아온 이후로 그런 일은 웬만하면 생기지 않았다-그저 재수가 없으려니, 하고 화성의 얄쌍한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의 근심 어려 긴장한 표정에 힘이 살며시 풀렸다.

 

"삼랑, 그것보단, 우리 이곳에서 나가기로 할까?"

 

"...응."

 

기억을 숨긴다는 개념은 사실 보다 간단하다. 쉽게 설명하자면, 복잡한 미로와 같다. 다른 점은, 그 미로가 정확히 미로처럼 생기지 않았고, 더욱더 간교하고 사악한 것으로 구성되어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요마귀괴들이 기이한 능력을 갖추고 있고 그중 가장 꼭대기에 서 있는 것들은 선인과 귀왕이지만, 사련은 이번에는 꼼짝없이 벌레의 농간에 어울려야 하는 셈이었다. 무슨 과거를 가져간 거지? 넝마선인, ...., 국사, 화장군...

사련은 화성을 올려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난 잘 모르겠는...

 

"황아!"

 

뒤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뜻하지 않은 소리에 아무런 생각 없이 뒤돌아보았던 사련은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어버려 움직이지 못했다.

"...모후?"

 

 

 

사련의 얼굴에서 모든 생기가 빠져나간 듯 했다. 부르는 목소리 끝자락이 살며시 떨렸다. 그대로 굳은 몸은 어쩔 줄을 모르고 망부석이 되었는데, 사련은 자신을 끌어안는 모후의 모습에 그대로 멈춰버렸다. 힘주어 자신을 껴안는 감각이 산란하고 아찔했다. 그러나 사련은 마주 안아주지 못했다.

 

"네 생일인데 이런 구석진 곳에서 뭐 하니?"

 

모후는 사련의 손을 잠시 잡았다 놓고,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모를, 벽 뒤에 위치한 문을 열었다.

어색한 곳에 자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금박으로 치장된 문은 양쪽으로 열리며, 사련은 사색이 된 얼굴로 문 안 너머에서 비어져 나오는 황금빛을 마주했다.

사련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모후는 이미, 국주도 이미...

 

그의 생각을 전면으로 밟아 누르듯, 빛 너머에는 아주 안락하고 평온한 풍경만이 그득했다.

눈 앞에 펼쳐진 전경은, 그가 잠자리에 들기 전 화성에게 묘사해주던 휘황찬란한 모습과 쏙 빼닮아 있었다. 넋을 놓은 사련의 손을 모후가 끌었다. 그는 새치도 없고 주름도 없이, 고생하기 전 아름답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 세 번째 질문은 언제 낼 것이냐? 네가 결혼하는 것을 보아야 이 늙은이가 편하게 가겠구나 싶다."

 

"그의 말이 맞다, 황아야. 너도 이제 좋은 인연을 만나야 하지 않겠니. 다행히도 이번에 질문을 맞춘 아이는 참으로 총명하고 아리따워 보이더구나..."

 

"무슨. 똑똑하고 총명한 것보다 귀하게 자라난 멍청한 사람이 훨씬 낫지..."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 사련은 알고 있었으나…. 속절없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서 마주하는 추억은 날카로운 가시처럼 사련의 몸을 파고들었다. 사련이 이루고 있던 모든 희망과 긍정적인 생각들이 한꺼번에 몸을 통과하여 멀어지는 것 같아 땅에 무거운 몸을 디디고 서 있을 수 없었다. 그의 동공이 좁쌀처럼 작아지며,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부황? 모후?"

 

"그래, 왜 그러니."

 

분명 기억을 훔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이리 생생히 기억하는 것이지? 왜 이렇게 낯선 곳에서 아주 익숙한 것들이 나를 덮쳐오는 거지? 고개를 수그리고 손으로 입을 틀어쥐었다. 그러지 않는다면 저도 모르게 억눌린 짐승과도 같은 신음이 비어져 나올 것 같았다. 사련은 계속해서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이 곳에서 나갈 수 있어?"

 

"난 모르겠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나지 않는 것은 없어…. 공백은 없어. 기억을 가져가면 공백도 있어야 하는데, 나는 모든 게 그대로야. 삼랑, 삼랑..."

 

사련에게 건네는 화성의 어조에서 초조함과 급박함이 묻어났다. 그의 눈에 한 줄기 빛이 지나갔으나, 이내 사련을 담자 그 광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반복해서 사련을 차근차근 어르며 달랬다.

 

"전하. 아닙니다. 잊으신 게 하나 있어요. 모든 기억이 제 자리에 있지만, 지금,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지 않으십니까. 그걸 말해주세요, 전하, 네?"

 

"뭐...?"

 

사련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국주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사련은 애써 고개를 내젓는다. 분명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이 있을 텐데. 목소리를 쥐어짜 내려 했으나 메마른 목구멍에서는 거친 숨소리만이 피어올랐다.

 

"음? 뒤의 그 사람은 누구지?"

 

이목이 화성에게 집중되었다. 화성은 사련의 뒤에 서서, 가라앉은 눈빛으로 환한 황궁을 천천히 훑어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어딘지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과도 같은 경계심과 갈리지 않은 이빨과도 같은 면모가 존재해, 주변에 있던 경비병들은 순식간에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황아야! 어디 안 좋은 거니? "

 

모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조용한 황궁을 메웠다. 사련은 괜찮아요, 라고 말하려 했으나 목에 무언가 걸린듯이 그저 컥컥거리는 기침 소리밖에 낼 수 없었다. 순식간에 험악해진 내전의 분위기에 평소에는 너그러운 분위기의 국주마저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때를 틈타, 바로 몇 시진 전만 해도 화성을 잡으라 소리치던 경비병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폐하! 이 놈은, 태자 전하의 문제에 도전한 놈입니다!"

 

"어찌하여 그가 이곳에 있느냐?"

 

"저도 알 수 없으나, 태자 전하의 동향을 보아 분명 좋은 연유는 아닐 것입니다! 국주의 허가도 없이 황궁에 발을 들인 것부터 의심스러우니, 죄인 하옥을 청합니다!"

 

국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잡아다 감옥에 가둬라! 죄의 유무는 내일 아침 가를 것이다!"

 

"저, 잠시만...!"

 

"더는 말하지 않아도 좋다! 여봐라! 태자를 방까지 보호하고, 그놈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이어지는 말에 사련은 무언가라도 저지해보려 허리를 펴고 숨을 들이켰으나, 그의 손에 닿은 따뜻한 온기에 숨을 내쉬지도 못한 채 그저 뒤돌아 화성의 눈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이 감들어있었으나, 화성 자신에 대한 걱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온전히 사련을 향한 염려만이 있었다.

 

"형, 형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게."

 

*

 

화성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채로 선락 황궁의 가장 최하층에 투옥되었고, 사련은 경비병들에게 이끌려 화려하게 치장된 방으로 끌려들어 왔다.

 

화성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깨어나려면 사련이 이것을 스스로 깨달아야 하기에 말하지 못하고 그의 옆에 서 있어 준 것이겠지. 그러나 정말, 아무리 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꿈은 하필 사련의 생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 말인즉슨, 사련이 태어난 날에 대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인데.

 

방안을 서성이던 사련은 문득 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사실을 떠올렸다.

 

방의 구조도, 황궁의 모습도 자신이 기억하는 선락의 모습과는 달랐고, 심지어 자신은 청혼자들을 처형시키려던 잔혹한 태자, 아니 공주도 아니었지만, 오늘 그가 보았던 모습은 그가 마지막으로 선락에서 보냈던 탄신연회와 정말 유사히 닮아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낯설고도 익숙한 공간에서 '낯섦'을 구조하는 요소들은, 그가 살아오며 지나쳤던 선락 이외의 생일에서 가장 뇌리에 깊고 진하게 박힌 기억들이었다.

선락의 문양과 유사하지만, 전혀 같지 않은 영안의 건물장식과, 삼랑이 입고 있던 초라하고 허름한 옷은 선락보다는 반월의 복식에 가깝다 할 수 있었다.

 

 대부분 꿈은 현실에서는 어색한 부분을 이리저리 끼워 조합해 꿈을 꾸는 사람이 괴리감을 느끼지 않게 변형한다. 그리하여, 꿈을 꿀 때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지만, 꿈을 깨면 그제야 오류를 알아차리게 된다.

 

처음 선락과 판이한 건물이나 복식에도, 전혀 자신의 방이 아닌 낯선 공간에도 아무런 의구심 없이 받아들인 이유가 이것이리라. 처음 그렇게 자각하자, 공간이 크게 한번 뒤틀렸다.

 

아주 오래된 세월의 기억들이 사련에게 몰아치는 폭풍처럼 눈앞으로 밀려들어 왔다. 그것은 머리칼 사이사이를 스치며, 순간 알 수 없는 감각에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강력하게 각인된 잔재들이었다.

 

어린 태자, 상원제천유에서 신을 기쁘게 한 태자의 추억에서부터, 어린 반월의 생일날 꽃을 안겨주던 화장군, 낭천추의 생일날 국왕의 피에로 붉게 젖은 칼을 들고 뒤돌아보던 영안국사, 그리고 그 뒤로 기억에 가장 깊은 곳까지 묻어버린 채 완전히 벗겨지지 않은 추억들의 날카로운 파편들만을 이따금 더듬으며 살아갔던 나날들을.

 

그리고 지난 1년, 화성이 없던 날들이 그 기억의 가장 마지막에 있었다.

 

사련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의 생애는 비단 선락태자, 화장군, 영안국사, 그리고 백의화세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지금 넝마선인이자, 귀왕의 사랑이었다. 그리고 더 큰 미래가 있었다.

 

화성이 자신을 기다렸듯, 사련도 그를 기다렸다. 그와 함께할 미래를 위해. 가슴이 무너지고 눈물이 절절 흘러넘치는 기다림은 아니었으나, 사련은 덤덤히, 차분하게, 그러나 어느 순간마다 한 번씩은 애타게 기다렸다. 몸은 가만히 있더라도, 마음은 벌써 그와 함께한 미래에 있었다.

 

사련은 알았다.

 

전부 깨달았어, 사련은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별과도 같은 총명함. 광휘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나는 이곳의 사람이 아니잖아."

 

그가 고개를 들자, 어느새 낯선 방은 사라지고 사련의 앞에 그의 부황과 모후가 있었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아야 한다. 사련은 그리워 마지않았던 부모를 눈에 담았다. 그가 사랑하는 얼굴들이, 끔찍한 기억으로 뒤덮여 흔적조차 들출 수 없게끔 사라졌던 얼굴이 그의 앞에 사련이 사랑했던 형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모후, 부황..."

 

"황아..."

 

다시는 마주할 수 없는 광경이라는 생각에 사련의 가슴이 요동쳤다. 지금까지 해주고픈 말들이 너무 많아요. 많았어요. 그리웠습니다. 보고 싶었어요. 저는 행복해요. 행복하신가요. 뱉어낼 말을 고르기 위해 입을 몇 번이나 뻐끔거렸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모나지 않은 말을 고르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사련은 그들의 손을 잡았다. 어떠한 감각도 없었다. 이것은 오래된 추억에 불과했고, 그는 같은 세월의 결을 따르고 있지 않았기에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간의 간극이 이어지고, 부황과 모후는 서로를 바라보다 사련을 천천히 품에 안았다.

 

"련아."

 

"어머니..."

 

모후는 사련을 안은 팔을 풀었다. 사련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는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꿈에서라도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정체된 과거만이 변하지 않았다.

조용하지만 단호하다. 기억하는 그대로, 이 자리에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그대로 꿈과 무의식이 만들어낸 모습들이.

 

"......"

 

느슨해진 팔은 허공을 어색하게 맴돌았다. 사련은 발걸음을 돌린다. 천천히, 무거운 발을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간다. 티 내지 않으려 살며시 돌린 어깨 너머의 풍경은 너무나도 따스했다. 그러나 안주할 수 없다. 기계적으로 그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익숙한 밤의 풍경과 건물에 내디딘다.

천천히, 천천히, 조금씩 그는 걷는다.

 

"화장군."

 

"국사."

 

목소리들이 귓가에 속삭여진다. 사련은 하나하나 귀담아들으며 천천히 그가 있을 곳으로 내려간다. 이 황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고귀한 태자, 사련은 걸었다.

걸음은 너무 느려, 그는 빨리 걸었다. 그것조차 느렸다. 그는 어느 순간 달리기 시작했다. 무거운 금관 장식도, 거추장스러운 목걸이도, 무거운 비단 겉옷도 천도 모두 훌훌 벗어 던지고서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힘을 다해 화성이 있을 곳으로 뛰었다.

 

"제 선물이에요... 제가 찾을 수 있던 것 중에는, 가장 아름다웠어요."

 

"국사의 탄신은 언제입니까?"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는 홍등들이 그의 뒤로 재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사이사이로 그를 돌아오게 하려는 고통스러운 과거가 비춰지고 있었다. 과거에 안주하거라. 잃은 것들을 네게 돌려주마, 미래의 미지보다 과거의 확실한 운명을 보여주며 끊임없이 그를 유혹한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다.

 

나는 두 번 돌아간다면, 두 번 모두 똑같은 선택을 하겠어. 세 번이고, 네 번이고, 열 번이고, 백번도 할 수 있어. 그것이 나를 이루었으니까. 아프고 쓰라린 고통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너를 만나게 했으니까!

 

"화장군, 생일 축하해요."

 

"국사의 탄신일을, 축하드립니다."

 

사련의 주변에 서서 쇠사슬처럼 옭아매여있던 모든 과거의 모습이 눈앞에서 환한 빛으로 화했다. 방심국사, 어린 태자, 화장군, 백의화세, 사련이 감내해야 했던 그 모든 억겁의 세월이 한순간에 겨울의 얼음이 녹듯, 꽃이 피어나듯 천천히 사련의 안으로, 녹아들었다.

 

사련은 끝없이 걸어 내려간다. 선락의 황궁은 높고 계단은 길고 길었다. 거꾸러지거나 발을 헛디뎌도, 그는 금세 다시 일어났다. 사련은 그를 향해 질주한다. 이 모든 추억을 뒤로하고서.

 

한없이 내려가고, 내려가 어느새 바닥에 꼴사납게 넘어지며 감옥으로 추락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경비병도, 감옥도, 삼랑도 없었다.

 

어디 있어?

너를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해?

 

가장 높은 곳으로 오르면 그를 찾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사련은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황궁의 기와가 올려진 지붕으로 단번에 뛰어올랐다. 시린 여름밤의 바람이 볼을 에는 듯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사련은 점점 더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화성을 찾을 수는 없었다.

 

어디 있어, 너는? 애타는 숨결을 몰아쉬자 차가운 밤하늘 공기에 미약한 그리움이 더해진다.

 

그러나 곧 머지않아, 그의 등 뒤에서 미혹적인 숨을 가졌으나 어딘가 애잔한 목소리가 조용하게 울려 퍼졌다.

 

"전하."

 

사련은 순간 멈췄다. 한번 숨을 들이쉬고, 그는 천천히 뒤돌았다. 조용히 흐르는 시간은 더욱더 길게 흐르고, 호흡마저 멈추고 온 세상에 둘밖에 존재하지 않는 듯 했다. 사련은 저도 모르게 화성의 품으로 달려가 안겼다.

 

"위험..."

 

위험하다고? 그런데도 사련은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 위험한 것은 별로 높지도 않은 이 황궁 지붕보다, 화성과의 추억을 통째로 없던 것으로 해버릴 뻔했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무엇도 중요치 않았다. 몸이 부서지는 것도, 마음이 부서지는 것도... 모두 다 중요하지 않았다.

 

벌레는 그 어떤 과거의 기억도 좀먹지 않았다. 사련의 모든 기억과 추억은 이곳에서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아프고 괴로웠던 나날들이었지만, 모두 그를 아주 오래전부터 쌓아 올려 튼튼하게 버티게 해 준 기억들이었다. 잃어버린다면,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린 것과 마찬가지일 터. 하지만, 사련은 처음부터 쭉 그 자신은 그대로였다. 이제 왜인지 알았어. 사련의 눈빛이 형형해졌다.

 

"훔쳐 가 버린 것, 내가 좀먹힌 것은..."

 

사련이 숨을 들이켰다.

 

"너와 내 미래!"

 

그 순간, 밤하늘이 거울이 깨지듯 천천히 산산조각 부서지기 시작했다.

 

화성과 그의 미래! 앞으로 그들이 만들어나갈 모든 순간순간의 감정과 행복을 미래라는 단어에 응축 당하여 빼앗겨버린 것이다. 모든 것 중에서 단 하나가 모자랐다. 미래. 그것이 이 자리에 없었다. 원래의 사련이라면 이런 과거의 잔재에 갇히지도 않았겠지.

 

당장은 티가 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고 물 밑의 간계가 드러날 때가 되면 그제야 문제를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기엔, 이미 빼앗겨 버린 미래는 다시 찾을 수 없었겠지. 화성의 품 안에 안긴 사련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지?

가슴에서 뜨거운 금빛 감정이 들먹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추억에 갇힌 채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 사랑할 수 없었다. 사련은 지금, 이 순간, 화성을 사랑하기 위해 있다!

 

"삼랑!"

 

두 사람의 손이 맞물렸다. 사련은 얼굴을 찡그리고 울부짖듯 소리치며 화성의 양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미안해하실 것 없습니다. 전하는 잘못하시지 않았어요."

 

"내가 너를 잊었어! 내 미래는 너와 있다는 걸 잊었어!"

 

화성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깊게 끌어당겼다. 보이지 않는 힘들이 그들을 더욱더 옥죄이듯 깊은숨을 쉬어 서로의 체향을 들이마셨다. 허리 뒤로 얹어진 손에 힘줄이 도드라지다, 그들은 서로를 안은 팔을 풀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서로의 이름을 계속해서 불렀다. 그리고, 그저 바라보았다.

 

침묵은 길었고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말보다 눈빛과 그 사이에 있는 공기와 숨결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사련은 화성의 검고 깊은 눈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화성의 눈가를 쓸었다. 사련이 나지막이 화성을 불렀다.

신성(神聖)함에 가까울 그 조용한 부름에, 화성은 답한다.

 

"네, 전하."

 

숨소리가 오간다.

 

"내 생일은, 앞으로도 네가 꼭 챙겨줘야 해."

 

"...영원히 제 몫이에요. 약속하셨습니다."

 

추억으로 이루어진 허영이 무너졌다. 모든 세상이 요동치고, 혼란에 감싸이는 그 와중에도 두 사람은 잔잔한 호수에 떠 있는 듯 고요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추억은 바래고 잘게 잘게 흩날렸다. 찢어지고 망가져 가끔은 그렇게 변해버린, 되돌아갈 수 없는 나날들을 보며 울적하고 슬퍼지기도 하겠지만, 고개를 들어 앞을 보면 당신과 함께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나가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운명이 당신들을 서로 이끈다면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질문, 기억해?"

 

사련이 웃자 화성도 화답한다. 두 사람의 손은 포개어진 지 오래이며, 무너지는 세상과는 대조되는 풍경이었다.

 

"기억합니다."

 

"그럼 질문할게요, 용감한 도전자.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으며, 날 아주 애타게 하는 것. 보기만 해도 가슴이 쿵쿵대는 것. 불꽃보다도 강렬하고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것은 무엇일까."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한다. 화성은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 천천히 슬프지만 옅은 호선을 입가에 그렸다.

 

"그것은, 저인가요."

 

사련은 웃었다. 아주 환히, 정말 밝게 웃었다.

 

"정답입니다."

 

환상은 거의 종말의 막바지로 치달았다. 환한 별처럼 부서지며, 울렁이는 가슴을 사련은 웃음으로 화한다. 화성은 천천히 사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뜨거운 숨이 서로를 향해 얽혀들고, 닿은 곳은 홧홧한 불씨와 같으나 따스한 온도로 달아올랐다. 화성이 붉은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세 번째 수수께끼를 맞춘 도전자는…. 이 나라의 금지옥엽, 그를…."

 

"보물로, 갖게 되지요."

 

무너지는 꿈과 두 사람은 겹쳐 든다. 무량억겁의 시간이 지나고, 모든 것은 잦아들었다.

 

 

*

 

 

"우와."

 

진짜 보제관으로 돌아왔다.

 

아직은 잠의 마수에서 완전히 풀리지 않은 사련이 시원하게 웃었다. 맑은 웃음소리가 햇살 드는 보제관의 아침을 메웠다. 화성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자신의 팔로 사련의 허리를 감싸 볼을 그의 어깨 뒤편에 기댔다. 사련이 웃자 기분 좋은 움직임이 화성의 볼에 전해졌다. 따스하다.

 

“화려한 옷을 입은 형은…. 정말이지.”

 

너무 극적인 꿈이었어. 잠깐이지만 헤어나오기 싫을 정도였다니까. 화성이 보드라운 이불을 꾸욱 끌어안으며 달콤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삼랑도 참..."

 

화성은 잘게 웃었다. 못 말린다는 것처럼 웃는 사련은 항상 그의 마음을 산란히 흔들었다. 그들이 본 선락 공주에 대한 이야기는 실화인지도 불분명했고, 심지어 원작의 '공주'가 아닌 '태자'였지만 설령 그것이 사실이 아닐 지더래도 꿈에서 본 얼굴은 너무나도 인상 깊고 사실적으로 남아있었다.

 

“전하.”

 

“응?”

 

그냥 불러봤어요. 뭐야, 그게. 사랑스러운 목소리는 몽롱해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사련은 어젯밤의 꿈을 생각했다. 그곳에는 어머니가 있었고, 아버지가 있었고, 어린 모정과 풍신이 있었으며, 아주 오래 사랑했으나 자신보다 먼저 떠나간 사람이 수두룩했다. 추억은 아프고 쓰렸다. 그러나 눈물로 점철된 길의 끝에는…. 화성이 있었다. 마치 그를 위한 행운처럼.

사련은 따스한 햇볕에 반사되는 보제관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추억을 떠올릴 때 눈물이 난다면 어때.

아팠고 힘들었던 과거였어도 어떤가?

이제 사련의 곁에는 화성이 있다.

화성의 곁에는, 사련이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은, 둘은 영원히 행복했어요- 보다도 더 확신에 찬 문장이리라.

 

“맞다, 형.”

 

기분 좋은 아침햇살, 바람,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들.

 

"생일, 축하해."

 

완벽한 인생이 아닌가.

 

 

*

 

.

.

.

 

아, 이건 비밀인데 말이에요.

내가 사랑하는 네가 있는 세계.

그것만으로 나의 생일은 충분하지 않을까?

물론, 말하기엔 아직은 좀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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