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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은살 하나 박히지 않은 깡마른 하얀발이 짙은 모래사장 위에 한발작 한발작 자신의 흔적을 남겨가다 곧 차올라온 바닷물에 사라지고야 만다. 차가운 바닷물이 애꿎게 발목을 찰싹 때림에도 아무렇지 않은듯, 오히려 기분좋은듯 휘파람 소리가 부드럽게 흘러나온다. 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하늘아래 새하얀 의복을 갖춘 새하얀 피부의 그는 썩 어색하게 보인다.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털썩 앉자 그것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바닷물이 둥글게 솟아오르더니 곧 사람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 어르신, 이러면 저희가 곤란하다고 말했지 않습니까"

 물귀신의 말투는 퍽 예를 갖춘듯 하지만 그것이 반어법과 같은것이란걸 사청현은 알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이마 사이로 깊은 세로줄을 만들고 사냥감을 찾는 매의 눈마냥 부랴뜬다면  설령 눈치가 좋지 않은 사청현이라도 알아차릴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러다가도 하공자 앞에선 표정풀겠지. 사청현은 힘의 권력구조가 뚜렷한 이곳 흑수귀역을 한탄 하는것밖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혈우탐화 화성이 돌아와 보제관에서 밀린 잔치를 끝낸 후 당연하게 다시 황성 골목의 사당에 돌아가 눈을 붙였었다. 다시 눈을 떴을때 예상치못한 곳이 보일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채말이다. 

 

[쌍현]

만개

 

 낯선공간에서 눈을 뜬 사청현은 그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작은 촛불하나 켜지 않아 어두운 공간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사청현은 그곳을 꿈이라 이해했다. 꿈속이라 생각하니 평소엔 없던 용기가 생겨나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탐험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누워 있던 침상에는 호화로운 조각이 새겨져 있어 한눈에 봐도 값비싸 보였으며, 그의 몸을 덮고 있던 침구는 은은한 광택을 내비쳤고, 침상에 둘러쳐진 면포는 꽤나 야릇한 분위기를 덧내기까지했다. 인계 왕들의 삶에 관심이 없었기에 그들의 침상이 어떠한지 직접 본적은 없으나 후궁들의 침상이 딱 이런 분위기를 풍길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안은 꽤나 넓었으나 가구는 오직 침상 뿐이라 허전해 더이상 볼것도 없었다. 

 사청현이 방밖으로 나서려 걸음을 세걸음도 채 떼기전에 문에서 익숙한, 잊을 수 없는 인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흑수침수 하현. 사청현의 양 동공이 축소되며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뜨고 싶었으나, 몸은 그에 따라주지 않은채 나무토막처럼 굳어 있었다. 역시 무예를 익힐것 그랬다며 스스로를 탓하며 이 역경을 헤쳐나갈 방법을 찾기위해 머리속을 이리저리 굴렸을 때야 한발짝 늦게 이곳은 자신의 꿈임이 생각났다. 온 몸의 긴장이 스륵 풀리더니 그대로 주저 앉을 뻔했다. 좀더 용기를 낸 사청현은 몇걸음 더 떼어 하현의 앞에 서 아무렇지 않은척 했다.

"하공자, 여기 유명수부야? 흑수침주의 방치고는 너무 허전한거 아냐?"

 이 앞의 남자는 자신이 알고 지내던 명의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꿈인이상 자신이 명의이길 바란다면 명의일것이다. 사청현은 그렇게 믿었다. 그럼에도 그의 답이 들려오기까지의 불과 일이초가 그가 살아온 기나긴 세월처럼 느껴졌다. 

"이곳이 내방일리 없잖아." 

 다행히도 그는 자신이 바란대로 지금 명의ver인듯했다. 

 방이 어두웠던탓에 하현의 표정 또한 움찔거렸단것을 사청현은 알아채지 못했다. 두사람은 마치 그 옛날 상천정에서 지내던 시절처럼 대화를 이어갔다. 사청현이 술을 원하니 하현의 손짓에 술이 대접되었으며, 그가 다과를 원하자 마찬가지로 다과가 나왔다. 사청현은 맛있는 술과 달콤한 다과, 그리고 절친한 친구까지 있으니 천황의 자리가 부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청현은 말하고 하현은 들었다. 그가 어떠한 얘기를 해도 한결같았고, 한결같은 대답에 사청현은 콧내음 섞인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러댔다. 그 옛날과 다른점이라면 사청현의 몸에는 더이상 법력이 존재하지 않으니 그가 술에 취해버렸단것 뿐이다. 사청현은 제 입술에 부드러운것이 닿았으며, 뜨거운 손길이 자신의 몸을 쓸은것 같은 애매한 감각만 남은채 눈을 감았다.

 

 다시 눈뜬 사청현은 여전히 유명수부였다. 지난밤이 꿈이 아니었던걸까 아니면 그건 꿈이 맞고 실제로도 이곳에 들어와버린걸까. 패닉에 빠진 사청현이 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얼얼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왜 허리가 아픈거지? 침상이 불편해서? 그럴리 없었다. 불과 몇일전까지만해도 땅바닥을 가리지 않고 자던 자신이 아닌가. 몇 각의 시간이 지나자 침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청현에게 물귀신들이 인계의 먹거리를 놓아주었다. 그러고 또 몇각이 지나니 하현이 들어왔다. 하현을 본 즉시 자신의 머리를 침상에 부딪혀보았지만 안타깝게도 바람과 달리 아픔이 느껴졌다. 무슨 바보같은 짓을 하고 있냐는 하현의 핀잔이 들려왔다. 그 모습이 자신의 친구였던 명의를 겹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풀었다. 다시금 한명은 재잘거렸고, 또 한명은 그것을 들었다. 또다시 아침이 찾아왔으며, 또 다시 같은 밤이 찾아왔다.

 사청현은 이제 이곳이 꿈이 아님을 알고 있다. 현실에서 풀어야할 얽힌 끈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그것을 보이지 않는곳에 숨긴채 그저 현재를 살아갔다. 점점 흑수귀역안에서 생활범위를 넓혀갔으며, 그곳에 속한 많은 물귀신들과도 안면을 텼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와는 별개로 그들은 사청현에게 손을 대진 않았다. 오히려 보호자 역할을 하기까지 했다. 위험한 구역에 들어가면 막고, 다치면 치료해줬다. 재수가 옴 붙은건지 사청현은 시도때도 없이 보호가 필요했으니 물귀신들이 그를 썩 좋지 않게 보는것도 당연했다.

 현재의 상황도 그것의 연장선이다. 인간의 몸이 된 사청현은 당연히 병에 걸릴 수 있었고, 밤바람을 쇠는것을 즐겼으니 감기에 걸린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탓에 평범한 인간의 배로 산 사청현이 외출금지를 당했으나 허구헌날 밖에 나오는 탓에 물귀신들이 골머리를 썩고있게 된 것이다. 

 "와하하하하..... 하지만 지금 밖은 한창 벚꽃이 필 때야. 아름다운 벚꽃나무 아래서 술한잔 마실수 있다면 이정도 감모풍한은 금방 나을걸?"

 물귀신의 이마 사이의 선이 더욱 뚜렷해져간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사청현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혼자선 여기에서 못나가는거 알아. 바쁜 하공자를 귀찮게 할 생각도 없어. 하지만 혹시라도 벚나무가지가 떠내려올지도 모르잖아. "

 그럴리가 없었다. 이곳은 튼튼한 배도 멀쩡히 들어올 수 없는, 모든걸 가라 앉히는 흑수귀역임을 사청현이 모를리는 없었다. 단지 유명수부 안에만 있는건 너무나도 갑갑해서 몰래 나온것이고, 들키게 된 이상 뭐라도 변명이 필요해 아무거나둘러댄것이다. 다행히 들어먹힌것인지 물귀신의 표정이 더 험악해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의무를 소홀하지도 않았다. 사청현은 물귀신의 손에 이끌려 유명수부안 침상뿐인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야했다. 

 

 흑수침주 하현은 매일밤 사청현의 방으로 들어와 밤새 사청현의 재잘거림에 함께해주곤 했다. 그가 인간들 사이에서 지낸것은 불과 몇년에 불구한데 나오는 이야기는 어쩜그리 많은지 하현은 순간 그가 몇백년은 그리 지낸것같은 착각까지 일었다.사청현이 졸음에 못이겨 보리처럼 고개를 숙이면 하현은 그를 들어 침상에 눕혔다. 그의 머리맡에 앉은 흑수는 손가락으로 사청현의 검은 긴 머리카락을  빗어내리곤 했다. 누가 본다면 자못 연인의 모습이라 여길것이다. 사청현은 아직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 않았을 뿐더러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그런 관계가 되어도 될지도 알수 없었다. 하지만 범부의 생각으로 이해하기엔 너무나 많은것이 지나갔으므로 지금은 그저 느껴지는 감정에 충실하기로 결정했다. 

 흑수침수는 차가웠고 무뚝뚝해 말이 적었으며 자신의 말엔 성실히 대답하는법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으며 맞잡는 손은 따뜻했다. 그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만질때는 저도 모르게 그 손길에 기대어버렸다. 좋았다. 오늘하루만 지나고 생각하자. 오늘하루만 더. 그렇게 몇달이 지나가 차가운 눈꽃송이가 파릇한 새싹이 되는 계절이 되고야 말았다.

" 오늘 나갔다며"

"응. 미안"

 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괜찮아'라는 말을 대신하는것이었다. 하현은 필요없는 말을 하지도 않았지만 하고싶은말을 참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청현은 자신들의 관계를 더욱 알 수 없었다. 아무말도 하지 않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것일까. 사청현은 천천히 눈을 감은채 입술을 열어 의미없이 한마디를 뱉어 내었다.

"하공자, 벚꽃보러갈래?"

 사청현은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헛소리한다며 다그치겠지. 하지만 생각했던 말은 커녕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사청현은 의아함에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침대 맡에 앉아 말없이 자신을 내려보던 하현의 표정은 어쩐지 애처로워보였다. 내가 미친게 분명해. 사청현은 자신의 볼을 때리고 싶어졌다. 감히 누가 동로산에서 난 귀왕을 가엾게 여긴단 말인가. 그것은 그 어떤 신관은 당연하고 평범한 사람이 된 자신은 더더욱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반듯한 눈썹과 입은 그의 표정이 무표정임을 알려준다. 아니 눈썹 끝이 내려와 있던가. 한번 애처롭다 생각하니 아무리 다시보려해도 쉽게되지 않았다. 사청현은 그만 눈을 질끈 감고말았다. 

"돌아가고싶어?"

 한참을 지나서야 들려온 대답에 사청현은 방금전 표정이 머리속에 떠올라 지워지지 않았다. 부정하지 않으면 안될것만 같아 그는 곧바로 아니라며 짧게 답하곤 그의 손에 얼굴을 기대 부비적거렸다. 흑수귀역에서 나가고 싶지 않은건 사실이다. 이곳은 춥고 생기도 없어 생활하기에 좋은 환경은 못 되었다. 차라리 빈민굴이 좀더 나았을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생기가 없기에 이곳은 현실감이 없었고, 때문에 현실을 잊는 핑계가 될 수 있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순 없었다. 하공자와 자신은 서있는 길의 길이부터가 달랐다. 하지만 하루만더, 오늘만더. 사청현은 그렇게 잠에 들었다.

 

 흑수귀역에는 빛이 충분히 비치지 않아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청현은 본인이 일어난 시간을 낮이라 생각하기로했다. 일어났을때 하현이 침상에 없다면 더욱 확신했다. 하현은 낮엔 일하고, 밤엔 자신을 보러왔다. 오랜시간 명의의 옆에서 지내왔었기에 그의 생활습관이 규칙적인것은 누구보다도 사청현이 잘 알고 있다.

 흑수침주는 굳이 '명의'라는 인물을 연기할 필요는 없었다. 상천정의 누구도 '명의'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 알지 못했다. 단지 인계에 떠도는 명의라는 인물에 대한 자잘한 소문과만 맞추어 행동하면 되었고, 그것마저도 세상에 널린것이 헛소문이었으니 꼭 똑같이 따를 필요도 없었다. 사청현은 흑수귀역에서 생활하면서 명의로서의 그와 실제 그의 차이점이 크지 않다는것을 알 수 있었다. 좋아하는 음식, 생활습관, 말투 모든것이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오랜 친구였다. 사청현은 때로는 이것이 몽마의 환영이 아닐까 생각했다. 자신은 더이상 운이 좋은 풍사대인이 아닌 재수 옴붙은 라오풍(老風)이니 이런 행복이 찾아올 리 없었다. 언제 끝날지 모를 행복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사실은 이것이 흑수침주가 계획한 복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맞더라도 자신은 이곳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눈을 뜨자 거대한 인영이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것이 눈에 들어왔다. 물귀신들인가. 눈을 비비적거린 곧 뚜렷하게 보였다. 하현이었다. 지금은 밤인것인가 생각이 들 쯤이 하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이야. 일어나."

 사청현은 어리둥절했다. 이곳에 온 뒤로 계절이 바뀌는 동안 단 한번도 낮에 그를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바람이 불어 이시간에 날 찾아온걸까. 하공자 안 바빠? 바빴으면 좋겠냐? 아니.같은 실없는 소리같은 말을 주고 받은 후에야 사청현은 완전히 잠을 떨칠 수 있었다.사청현은 하현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해 보였다. 그런 그를 빤히 보고 있자니 그의 미간이 점점 좁아지는것이 보였다. 그러고 있을거야? 하현의 말을 들은 후에야 그가 기다린것이 자신이었음을 알아챘다. 몇겹이고 겹쳐있던 예전과 달리 속의 위에 중의만 걸치는 지금은 준비하는데에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을 수 있었다. 옷을 다 입은걸 확인한 하현은 사청현의 손목은 가볍게 쥐어잡고는 그를 이끌었다. 손목에서부터 올라오는 온기탓일까, 사청현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하현이 이끈곳은 유명수부 뒤의 넓은 못이있는 넓은 터였다.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더니 종당 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왔다. 어쩔 수 없긴했다. 유명수부가 있는 이 섬은 귀시장에 비하면 썩 넓지 못하기도하고, 그중 유명수부가 차지하는 넓이가 많아 어딜가던 유명수부 앞이고, 옆이며 뒤였다. 사청현은 뇌로는 알고 있으나 표정에는 묻은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그 못 주변에는 마른 나무들이 많았다. 봄임에도 잎이 나기는 커녕 가지조차 더이상 자라지 않는 듯하니 죽은 나무일 터였다. 하현이 그를 큰 나무 아래로 이끌었다. 사청현은 이제야 그가 이곳에 데려온 것에 의문을 품었다. 

"하공자, 여긴 대체 왜온거야?"

"네가 벚이 보고싶다고 했잖아" 

 당연하게도 하현의 답은 사청현의 의문을 풀어주지 못했다. 이곳은 모두 죽은나무였고, 살아있다 하더라도 벚나무로 보이는것은 없었다. 경색지국의 산수를 감상하며 약주를 즐기는 것을 낙으로 여기던 사청현이 벚나무 하나 알아보지 못할까. 사청현은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하현을 올려보았다. 하현은 그럴줄 알았는지 표정에 변화가 드러나지 않은채 턱을 살짝 들어 못을 가리켰다. 

 흑수귀역의 해수는 이름 그대로 모두 어두운 흑색을 띄었으며, 그의 중심인 이곳의 물은 더더욱 검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지금 사청현이 바라보고 있는 물은 맑고 투명하여 심지어 사방의 풍경을 비추기까지 했다. 사청현의 놀란 표정이 돌아오기도 전에 더 와하하 웃음소리가 터졌다. 연못은 깨끗이 청소 되어 있는 듯 했으나 단 한부분, 연못가의 거대한 죽은 나무를 아래에만 여러가지 것들이 떠있었다. 사청현이 자세히 바라보니 물귀신들이 자신의 옷을 띄우고 있었는데 그것의 색상이 온통 분홍빛이라 연못에 비친 나무와 함께 보니 마치 연못속에 벚나무가 피어있는 듯 해보였다. 

"하공자, 설마 벚나무 대신이야? 와하하하하하 이러다 나 또 귀신들에게 미움받겠어-"

 사청현은 너무나 웃은 나머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흑수침주 앞에서 억지 웃음을 지으며 옷을 흔드는 물귀신들이 우스웠으며, 자신을 신경 써준 하현에게 고마움이 들었다.

"아름다운 벚나무와 절친한 친구가 있으니, 이젠 술만 있으면 경국일색일거야."

 사청현은 감정적인 분위기를 타 평소에 말하지 못했던 말을 슬그머니 꺼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흑수침주 하현이 자신의 '친구'라는 말에 부정하지 않을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때문에 살짝 고개를 돌려 하현을 바라보았을때 그의 표정에서 분노가 읽히자 당황해 그대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하현의 미간에는 깊은 선이 자리하곤 얼굴은 쉼없이 움찔인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날에도 이런 표정은 본적이 없었으나 지금 사청현에겐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기쁨을 느낄 여유는 없었다. 붉으락 푸르락하던 하현의 표정이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가라앉아 '너는...' 이라며 말을 내뱉기시작했다.

"너는 친구와 몸을 섞나보지?"

 ?

 사청현은 당황했고, 당황했으며, 당황했다. 그러곤 곧 기억속으로의 여행을 떠났다. 꿈이라 착각했었던 유명수부에서의 첫날. 하현과 술을 벽없는 담소를 나누고, 술잔을 기울이다가, 그의 입술에.... 그의 손길이.... 그리고 다음날 허리가 아팠다. 거기까지 생각한 사청현은 그제야 상황이 파악되어 얼굴이 달아 올랐다. 지금까지 사청현이 묵었던 방은 신방이었던 것이었고, 자신과 하현은 초야를 치루었던것이다.

"자자자자자자잠깐! 자..잠깐..."

사청현은 머리속에서조차 말을 정리하지 못하여 끝없이 잠깐을 부르짖으며 양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머리속은 하현으로 가득 차 화끈거렸다. 사청현은 확실히 명의였던 하현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과거의 진실이 밝혀지고 그 마음또한 접었었다. 아니, 그래야했었다. 사청현은 여전히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는것을 깨달았다. 놀랍게도 그 또한 자신에게 같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사청현은 제 얼굴을 가리던 손을 풀고는 하현에게 바싹 다가가 눈을 마주쳤다.

"어어어언제부터?!"

 하? 하현은 사청현의 반응에 무덤덤하게 반응한듯했다. 하지만 사청현은 그가 이미 죽어 얼굴에 혈색이 없기에 티가 나지 않을뿐 그의 마음도 마냥 평온하진 않을것이라 생각했다. 사청현을 바라보던 하현의 눈동자가 비스듬하게 내려가 사청현의 시선을 피했다. 그날 다 말했어. 사청현이 한참을 다시한번 말해달라며 떼를 쓰자 하현은 모른다는 말만 내뱉고는 유명수부 방향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하현은 지난밤의 대화를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사청현을 보자 어느새 그를 유명수부로 데려와 버렸다. 자신에게 분노하거나, 또는 두려워할것이라 여긴것과 달리 그는 자신과 술잔을 기울이며 재잘거렸다. 과거와 같은 모습에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감정이 그만 솟아 올라와버렸다. 왜 하필 너였을까. 왜 하필 내 원수가 너이며, 왜 하필 내 마음이 햔한 사람이 너였을까. 괴로움에 속이 뒤집혔다. 차라리 네가 사라진다면 이 괴로움도 끝날까. 

 지난밤의 일을 얘기하며 술을 따르던 사청현의 몸이 하현에 의해 뒤로 넘어졌다. 사청현은 이미 술에 취해 자신이 넘어졌다는것도 인지하지 못한 듯 바보같은 웃음소리를 새어낼 뿐이었다. 손 끝이 점차 너의 목으로 향했다. 이 갸냘픈 목을 꺽는다면 이 괴로움도 끝날까. 숨은 가빠왔고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 했다. 손이 목에 가 닿자 갸냘픈 너의 목이 울렸다. 

'울지마 하형'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사청현의 얼굴위에 떨어진 자신의 눈물이 보였다. 내가 울 수도 있던가. 모든것을 잃었던 그날 모든것이 마른줄 알았다. 하현은 사청현의 옆에 털썩 주저 앉았다. 온 몸에서 힘이 빠진듯 축 쳐졌다. 목소리를 내려했으나 자신의 입이 마른 사막이라도 되는 듯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널 증오해, 저주해, 없어지길 바라. 입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말들이 목 안에서 맴돈다. 힘겹게 입을 열었을때 밖으로 말은 스스로도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널 은애하고 싶지 않았어.'

 스스로의 말에 놀란 하현은 사청현을 내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듣긴 한건지 여전히 베시시 웃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무슨짓을 하고있는거지. 하현이 자신의 한심함을 한탄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을 때 그의 귓가에 사청현의 목소리가 울렸다.

'난 그러길 잘한것 같아' 

 사청현의 짧은 말을 이해하는데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오래걸리지 않아 그 말이 그 또한 자신의 감정과 같음을 의미한단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청현의 말은 사막에 내리는 단비 같았으며 오랫도록 말라있던 우물을 채우는 물과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수렁으로 빠트릴 독사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어떠한 말도 이 감정을 표현할 수 없자 하현은 생각하길 그만 두곤 본능이 원하는 대로 행하기로 결심했다. 흑단같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덮어 그의 몸을 탐하였다. 그에게 이름을 불리길 원하였고, 그는 자신을 불렀다. 다른 이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그날 밤 이후 다시금 호칭이 '하공자'로 돌아와 있었다. 생각의 정리가 필요할것이라고 생각했지 설마 기억을 못해서 일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동안 유명수부에서 지내게 된 이유가 궁금하지도 않았던거야?! 그의 황당무계함에는 익숙해진줄 알았으나 완전히 익숙해지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듯 싶었다.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연못가에서부터 자신을 부르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청현이 눈에 보였다. 흑수귀역에 불어올리 없는 봄바람이 스친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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