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성격이 급하지 않아서, 궂은 겨울로 인해 잔뜩 얼어있는 땅 위로 아주 느긋하게 당도했다. 봄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소복히 쌓여있던 눈이 천천히 녹고, 움츠려있던 식물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게으른 봄은 빠르게 완연하지 않아서, 사람들은 아직 겉옷을 꼭 여민 채로만 바깥으로 나돌 수 있었다.
상천정에도 봄은 온다.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 봄 햇살이 상천정의 새하얀 거리 위로 잘게 부서지며 반짝였다. 바람은 아직 찬 기운이 남아있었는데, 얄궂게도 사련의 헤진 백의자락을 펄럭이게 만들었다.
“ 안녕하세요, 태자전하. ”
사련은 자신을 향해 미소지으며 인사하는 신관을 향해 마주 웃으며 인사했다. 이 태자전하는 얼굴이 정말로 준수했는데, 그 때문인지 미소를 지을 때 그의 곁으로 나비가 날아다니는 듯했다. 자신의 눈을 한 번 비비고 지나치는 사련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신관은, 이내 나비가 날아다니지 않는 것을 보고 역시 착각이라며 뒤돌아섰다.
상천정에 오른 후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지체없이 걷던 사련은 곧장 영문전에 들어섰다.
“ 잘 지내셨습니까, 태자전하. ”
저야 잘 지냈지만, 영문은 그렇지 않아 보여요….
비척이며 일어나 인사하는 영문을 보며, 사련은 뒷말은 삼킨 채 잘 지냈다는 형식적인 인사를 했다. 우스갯소리에, 영문전은 사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른 채로 바쁘게 돌아간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업무량이란 정말 너무한 수준이다. 신관은 죽지 않는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혹사시켜도 되는 건가. 사련의 머릿속에는 다소 심각한 고민이 자리잡았다.
영문전은 신(新) 상천정이 세워지면서 더욱 바쁘게 돌아갔다. 상천정이 다시 건설되는 과정에서도 미친 듯이 갈려나가기는 했지만, 새로운 상천정 위에서는 영문이 처리해야할 일이 예전의 몇 배였다. 덕분에 사련은 영문의 눈 밑으로 검게 죽어있는 부분이 볼 때마다 늘어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 영문, 괜찮아요? 내가 뭐 도울 일이 있을까요? ”
“ 괜찮습니다. 태자전하가 도우시는 일들은 저를 더욱 괴롭게 할테니까요. ”
사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과거를 생각해보면, 별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미건조한 얼굴의 영문이 사련을 이리저리 훑어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훑어보더니, 이내 일어서서 사련의 뒷모습까지 탐색했다. 사련은 영문을 모른 채 큰 눈을 깜빡이며 그녀의 기행을 지켜봤다.
“ ??? ”
영문은 그가 들어왔던 문까지 살펴본 후에야, 다시 사련의 앞에 단정히 섰다.
“ 전하께서 상천정까지 혈우탐화를 끼고 오셨는지 잠시 확인해봤습니다. ”
“ ... ”
사련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영문은 어색한 웃음 짓고 있는 사련을 뒤로 한 채 산처럼 쌓인 문서들을 뒤적거리다가, 이내 돌돌 말린 채 금색 끈으로 깔끔히 묶여있는 문서 하나를 그에게 건네었다. 사련은 영문에게 통령을 받고 온 터라, 다른 질문 없이 문서를 소매에 넣었다.
“ 피해가 심각한가요? ”
“ 22명의 사람이 실종되었고, 저는 심각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쓸만한 무신관들은 모두 임무 중에 있어서, 불가피하게 태자전하께 부탁드렸습니다. ”
사련은 신경쓰지 말라는 듯이 영문에게 웃어보였다. 영문은 그가 웃을 때, 왠지 그의 곁에 나비가 날아다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다시 그를 봤을 때는 나비는커녕 먼지 하나도 날아다니지 않았다. 사련은 갑자기 영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을 보자 어리둥절해졌다.
“ 영문? ”
“ 아닙니다. 제가 조금 피곤한 모양이군요. 전하께서 임무에 실패하실 거라 생각되지는 않으니, 무사한 여정을 바라겠습니다. 천관사복. ”
영문의 무미건조한 기원에 사련은 살풋 웃으며 대답했다.
“ 백무금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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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다시는 너와 함께 상천정에 가지 않을거야. ”
“ 왜? 형, 들키지 않았잖아? ”
“ 시도때도 없이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은나비를 풀면 어떡해? 들킬까봐 조마조마했어. ”
책잡는 내용이었지만, 사련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말투도 매우 나긋했다. 사련이 웃어보이자, 화성도 따라 웃었다. 웃음꽃이 핀 둘은, 방금 막 상천정에 올랐다가 내려온 참이었다.
결론적으로, 아까 전 영문이 사련에게 한껏 했던 의심과 탐색은 매우 타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화성은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 데에 매우 숙달되어있으니, 영문은 결국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여기에는 요즘들어 무르익은 사련의 연기력도 한몫했는데, 영문이 자신을 한껏 탐색할 때 어딘가 숨어서 이를 지켜보고 있을 화성을 생각하며 사련이 얼마나 웃음을 참았는지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다.
“ 형을 곤란하게 했다면 미안해. 하지만 형을 보니 은나비가 신나서 멋대로 날아가던걸. ”
거짓이 분명한 말이지만, 사련은 그저 귀엽다고 느끼며 웃어버렸다. 아까 전, 사련과 인사한 뭇 신관들과, 영문이 착각으로 치부했던 나비들은 모두 화성이 날려보낸 사령나비들이었다. 사련은 갑자기 나타난 사령나비들에 잠시 당황했었으나, 이내 익숙해져서 화성의 장난에 기꺼이 발맞춰주었다.
“ 형, 이번에는 어디야? ”
“ 천무산. 동쪽에 있는데, 꽤 멀어. ”
“ 축지천리를 써야겠네. 상천정에서 바로 내려갔다면 편했겠지만. ”
화성은 웃으며 망설임없이 말했고, 사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를 말하려는 듯이, 잠시 생각하던 사련은 이내 조금 우울해진 표정으로 화성을 올려다봤다.
“ 삼랑…. 이번 임무를 끝내고 나면, 아마 벚꽃은 다 진 후일지도 몰라. 정말 미안해. ”
일전에, 화성은 사련에게 봄이 오면 벚꽃놀이를 가자고 말한 적이 있었다. 사련은 별 생각없이 흔쾌히 수락했었는데, 봄이 오면 올수록 그는 내심 기대에 부풀게 되었다.
선락국 시절, 태자였던 사련은 가장 벚꽃이 예쁜 시기에, 벚꽃이 가장 아름답게 피는 장소에서, 부황, 모후와 함께 벚꽃놀이를 했었다. 조금 큰 후에는 풍신, 모정과 함께 잠깐이나마 벚꽃구경을 했었는데, 일련의 사건 이후 사련은 쭉 혼자였고, 살아가기에 바빠서 벚꽃놀이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사련에게는 아주 오랜만에, 자세히 말하자면 근 800여 년 만에, 누군가와 함께 맞는 봄이었고, 그리고 그 누군가는 이제 평생을 같이할 둘도 없는 소중한 연인이었다. 그래서 사련은 이 ‘벚꽃놀이’에 대해 드물게도 기대감을 가졌었는데, 못하게 된다니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게다가, 벚꽃놀이를 가자고 했던 화성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사련은 기분이 몹시 우울했다.
사련의 이런 마음을 알아챈 화성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웃으며 사련을 안았다. 사련이 고개를 들자, 미소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화성이 보였다.
“ 전하, 앞으로 당신의 모든 봄에는 제가 있을 겁니다…. ”
앞으로 함께 할 봄이 많이 있으니, 실망하지 마시라는 화성의 뜻에, 사련이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화성에게 안겼다. 아직 벚꽃이 피지 않은 봄의 살랑이는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장난치듯 흐트러뜨리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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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일이네. 벌써 보름째인데도 전혀 보이지가 않아. ”
나무에 기댄 사련이 한숨을 쉬듯 말했다. 점점 따듯해지는 봄 햇살을 견디지 못한 사련은 소맷자락을 두어번 접었다. 사련의 이마에 은근히 맺힌 땀방울을 닦아준 화성은 수통을 건네었고, 사련은 흔쾌히 받고서 마셨다.
화성과 사련은 보름 전, 지상에 내려오고서 축지천리를 이용해 지체없이 천무산에 도착했다. 하나, 문제가 있다면, 천무산이 보통 산들과 비교하여 크기가 매우 컸다는 것이고, 또다른 문제가 있다면, 영문의 문서에는 귀신의 위치와 같은 것이 정확히 나와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천무산은 원래도 음기가 자욱한 곳이어서, 천하의 절경귀왕도 귀신의 행방에 대해 고개를 내저었다. 즉, 사련은 이 커다란 천무산을 직접 발로 뛰며 귀신을 잡아야만 했다!
보름 동안 천무산을 돌아다녔는데도 귀신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찾을 수가 없으니, 사련은 벚꽃놀이는 진작에 잊어버린 채 귀신을 잡을 궁리만 하고 있었다.
“ 형, 귀신이 이렇게나 신출귀몰한데, 내가 보기에는 영문전에 조사를 부탁하고 우리는 돌아가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아. 형이 너무 지칠까봐 걱정 되네. ”
“ 나는 괜찮아. 영문전이 조사하는 동안, 또다른 사람이 실종될지도 모르니까 우리가 더 찾아보는 게 나을 것 같아. ”
사련의 완고한 말에 화성은 더 말하지 못했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던 사련은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다시 수색을 할 작정이었다. 원래 일어서있던 화성은 사련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 그럼 오늘밤은 마을로 내려가 객잔에서 쉬자. 계속 산에서 자는 건 좋지 않아, 형. ”
이번 화성의 말에는 사련이 흔쾌히 수락했다. 마침 사련도 화성이 보름째 산에서 노숙하는 것이 걱정되는 참이었다.
봄이란, 오는 것은 매우 느리고, 가는 것은 또 참 빠른 얄미운 계절이라. 천무산에서 귀신을 수색하는 보름 동안 봄은 스치듯 지나가버린 것 같았다. 어느새 푸릇푸릇하게 물들어가는 산의 풍경을 사련이 잠시 멍하게 쳐다봤다.
“ 형. 형? ”
“ 어, 삼랑? ”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
“ 별 생각 없었어. 무슨 일이야? ”
저기가 좀 이상해서.
화성이 손가락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사련은 미간을 찌푸렸다. 연분홍색으로 물들여진 꽃잎이 바람에 흩날려 온 것인지, 바닥에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 천무산은 봄이 이르게 와서, 지금은 꽃이 거의 다 져버린 상태였다. 저렇게 갓 떨어진 듯한 꽃잎은 무척이나 이상했다. 화성과 잠시 시선을 교환한 사련은 지체없이 떨어진 꽃잎을 따라갔다.
따라갈수록, 길에 떨어진 꽃잎은 점점 더 많아졌다. 이 꽃잎들은, 사람이 따라가도록 미혹하는 용도가 분명했다. 길의 끝에는 분명 사련이 열흘 동안 찾아 헤매던 그 귀신이 있으리라. 사련은 발 밑에 밟히는 꽃잎이 많아질수록, 점점 더 긴장했다.
사련은 자신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꽃잎에 몸을 흠칫하고 멈춰 세웠다. 사련이 꽃잎을 따라간 길은, 나무가 유난히도 커서 빛이 잘 들어오지 않고 다소 어두웠는데, 꽃잎이 흩날려오는 곳은 빛이 들어서 매우 눈부셨다.
눈을 가늘게 뜨고 걸어간 사련은 이내 눈이 크게 뜨였다. 사련은 선락국이 건재했던 시절, 부황, 모후와 함께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벚꽃후원을 갔었지만, 그곳도 이곳만큼 아름답지는 않았다.
사련을 둘러싼 커다란 벚꽃나무에는, 눈부신 벚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바람에 밀려 흔들리는 벚꽃가지가 사련의 눈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사련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가며 벚꽃을 바라봤다.
“ 형. ”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사련은 정신을 차린 듯이 뒤돌아 화성을 바라봤다. 벚꽃 사이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화성은 정말 위험하게 아름다웠다. 홍의의 절경귀왕은 정말 요사스러워서, 가끔씩 자신을 움직이지도 못하게 홀리고는 했으므로, 저 아름다움은 위험하다고 할 수 있었다.
사련이 화성에게 다가가 팔을 들어 그의 긴 머리카락에 붙은 벚꽃잎들을 떼주었다. 꽃잎을 뗄 때마다, 화성의 머리카락이 사련의 손가락을 간지럽혀서, 사련은 살짝 웃음이 터져나왔다. 사련이 웃자, 마주 웃던 화성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던 사련의 손을 붙잡았다. 사련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를 바라봤다. 화성이 미소지으며 사련에게 눈을 맞췄다. 사련은 화성의 검은색으로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보며, 잠시 멍해졌다.
“ 형, 날 사랑해? ”
화성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사련의 귓전에서 맴돌았다. 자신을 사랑하냐는 화성의 말이 큰 동굴에서 울리듯 사련에게 몇 번씩이고 들리는 듯했다. 사련이 돌연 가슴이 쿵쿵거렸다. 말할 필요도 없다. 사련은 화성을 사랑한다.
“ 나는, 삼랑을 무척 좋아해. ”
커다란 벚꽃나무가 만들어내는 봄의 정취에 두근대지 않을 연인은 없다.
낭만적인 장소에서, 사련이 눈을 감고 풋풋한 고백을 읊조렸다. 연인들의 고백을 듣는 것이 부끄러운지, 벚꽃가지들이 세차게 몸을 흔들어대며 기분 좋은 소리를 만들어냈다.
“ 내가 끔찍한 귀신이라도, 날 사랑해? ”
사련은 눈을 꼭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련의 가슴 속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화성의 목소리와, 심장소리가 함께 울려서 사련은 머리가 온통 어지러웠다. 그런 걸 왜 물어보는거야? 나는 분명히 너를 사랑해.
“ 무척 사랑해. ”
사련의 애정어린 고백에, 화성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화성은 사련을 감싸 안고는 그의 귀 앞에 대고 갈구하듯이 말했다.
“ 그럼 당장 나에게 입 맞춰줘. ”
사련은 갑자기 머리 위로 찬물이 끼얹어진 듯, 어지럽던 머리가 띵해지더니 이내 맑아졌다. 쿵쿵대던 심박소리도 신경쓰이지 않았고, 계속 들리던 벚꽃나무의 흔들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환상 속에 휩싸였다가 단숨에 벗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계속 감고 있던 눈을 뜬 사련이 자신을 껴안고 있던 ‘화성’을 강한 힘으로 밀치며 말했다.
“ 넌 삼랑이 아니야. ”
‘화성’이 사련에게 밀쳐져 뒤로 넘어지는 순간, 사련의 팔목에서 순식간에 쏘아진 백릉이 그의 전신을 세게 옭아맸다. 약야가 공격하는 순간, ‘화성’은 즉시 본색을 드러내며 사련을 공격하려 했지만, 약야에게 묶여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서 실패했다.
귀신이 약야에게 묶이며, 주변의 벚꽃나무들이 증발하듯이 모조리 사라졌다. 벚꽃나무는 커녕, 죽어서 말라가는 검은 나무들만이 사련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을 뿐이었다. 가라앉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사련은, 이내 약야에게 묶여 자신의 앞에 엎드려 있는 귀신을 쳐다보았다.
“ 개같은 자식! ”
사련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귀신은 여전히 화성의 얼굴을 한 채로 악귀같은 표정을 지으며 사련에게 신랄히 욕을 했다. 화성 본인이라면 그럴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꼭 그가 자신에게 욕을 하는 것 같아 사련은 순식간에 기분이 미묘해졌다. 불쾌했다. 더 이상 쳐다볼 수 없었던 사련은 여전히 얼굴을 찌푸린 채로 뒤돌아섰고, 화성을 찾기 위해 눈을 감은 채로 통령구호를 외웠다.
“ 형! ”
이 목소리는, 통령진을 통해 들리는 목소리가 아닌 직접 그가 사련에게 외치는 목소리였다. 사련이 감았던 눈을 뜨자, 과연 ‘진짜 화성’이 눈 앞에 있었다. 화성은 사련을 찾아다닌 건지, 머리카락과 옷이 잔뜩 흐트러진 모양새였다. 어느새 사련의 앞까지 다가온 화성이, 입술을 깨물며 사련에게 사과했다.
“ 미안해, 내가 놓쳤어. ”
“ 아냐, 내가 환각에 걸린 거지. ”
“ 다친 곳 없어? ”
“ 다치지 않았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
화성은 꽃잎을 따라가는 사련을 뒤따랐으나, 중간부터 그가 따라간 ‘사련’은 귀신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이상함을 눈치챈 화성은 단숨에 환상을 깨고 사련을 찾았으나, 화성은 환상 속에 있는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사련이 환상을 깨버린 후에야, 화성은 알아채고 그를 찾아낸 것이다.
사련은 한참 동안 자신의 앞에 선 ‘진짜 화성’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뒤를 돌아봤다. 여전히 화성의 모습을 한 귀신이 약야에 묶여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 이거야? ”
“ 응…. 모습을 바꿔서 사람을 홀렸어. ”
귀신을 내려다보는 화성의 눈동자는 가라앉을대로 가라앉아있었다. 화성의 마음 속에서는 저 귀신이 몇번이고 또 죽었으리라…. 사련은 즉시 귀신의 앞에 쪼그려 앉아 알아내고자 하는 것을 물었다.
“ 네가 지금까지 홀렸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지? ”
실핏줄이 가득 선 눈알이 다 보이도록 눈을 크게 치켜뜬 귀신이 기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어떻게 내 환각을 알아챘어? ”
다른 소리를 하는 귀신에 사련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식이라면, 아마 질문에 답하지 않을테니 상천정에 올라가서 심문하는 것이 빠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사련이 자리에 일어서려고 했다.
“ 그는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잖아! ”
악을 쓰며 말하는 귀신에, 사련은 멈칫했다. 귀신은 삐걱거리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갸웃했다.
“ 그럼 이 자는 어때? ”
사련은 무언가를 눈치채고, 손쓸 틈도 없이 귀신은 순식간에 모습을 바꿨다. 백릉에 묶인 군오의 모습이란 소름끼치기 짝이 없다. 전과 같이 눈을 한껏 치켜뜬 귀신은 깔깔 대며 웃었는데, 그 웃음소리가 꼭 쇠를 긁는 듯했고, 모습은 악귀가 따로없었다.
귀신의 웃음소리는 순식간에 끊겼다. 액명이 유려한 선을 그리며 귀신의 목을 깔끔하게 베었고, 귀신의 머리는 군오의 웃는 얼굴을 한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사련은 그의 얼굴을 쳐다봤고, 그의 눈동자 속에 비치는 자신을 보았다.
“ 전하, 괜찮으십니까? ”
화성은 다소 조급히 물어봤다. 뒤로 주저앉은 사련이, 자신의 옆으로 무릎을 굽혀 앉은 화성을 쳐다보았다. 환상 따위가 아닌, 사련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 괜찮아. 그는 두렵지 않아. ”
사련은 군오로 화한 귀신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돌연 깨달았다. 과거 자신은 분명히 군오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사련은 그를 한 번 이겨내었고, 이제 자신 있게 군오가 두렵지 않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또 다른 압도적인 두려운 존재가 나타난다면 사련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번처럼, 또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가? 하지만, 사련은 곧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사련은 화성에게 뛰어들 듯이 안겼고, 무릎을 굽혀 앉아있던 화성은 결국 뒤로 넘어졌다. 둘은 바닥에서 한참 동안 그렇게 서로를 빈틈없이 안고 있었다.
사련은 자신의 콧등을 간질이는 느낌에 눈을 떴다. 연분홍색 벚꽃잎이 공중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사련은 화성에게 안긴 채로 주위를 둘러봤다. 허공에서 벚꽃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사련은 얼마 지나지 않아 벚꽃잎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귀신의 본체가 부서지며 흩날리는 재들이, 꼭 벚꽃잎처럼 생긴 것이다. 사련은 갑자기 웃음 터뜨렸다.
“ 삼랑, 올해는 벚꽃놀이를 안가도 되겠어. ”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있으니, 두려워할 것이 없다.
사련이 살짝 몸을 일으켜 화성의 얼굴을 바라봤다. 화성의 얼굴 위로는 어느새 장난기가 짙게 배인 웃음이 어려있었다.
“ 형, 나는 벚꽃을 제대로 보지 못했는걸. ”
뭐?
사련이 당황할 틈도 없이, 화성이 그에게 입을 맞췄다. 반짝이며 떨어지는 벚꽃잎 사이에서 서로의 숨결이 오고갔다. 정신없이 입맞추던 사련은, 작은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목으로 입술을 묻는 화성을 껴안았다.
/
“ 그렇군요. 실종자들은 모두 사망…. 귀신은 처리되었으니, 이번건은 이렇게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
영문은 문서를 정리하며 말했고, 사련은 영문에게 웃어보였다. 골치 아픈 사건 하나가 해결된 것으로 영문의 과중업무가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사련은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련은 계속 미소를 띄우고 있었는데, 영문이 돌연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살짝 뻘쭘해져서 물었다.
“ 영문, 저에게 할 말이 있나요? ”
“ 은나비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이번에는 혈우탐화와 같이 올라오시지 않았나 봅니다. ”
사련은 웃고 있던 그대로 딱딱히 굳었다. 그걸 알고 있었어?? 충격 때문인지, 들켰다는 것 때문인지 하나의 석상이 되어버린 사련을 보던 영문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됐습니다. 내려가시죠. 임무 때문에 벚꽃도 보지 못하셨겠군요. 벚꽃은 졌지만, 혈우탐화와 남은 봄을 즐기시기를. ”
그제야 석상 모양새에서 벗어난 사련은 살짝 웃으며 인사한 후 영문전을 빠져나왔다. 늦자락 봄의 햇살이 쏟아지는 상천정 대로를 걷는 사련의 머릿속으로 화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 형의 소매자락만 걷더라도 벚꽃을 볼 수 있을텐데. ’
삼랑, 조용히 해줘….
장난기 어린 화성의 통령에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빨개진 사련이 속으로 나지막히 읊조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