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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화장군에게서 봄에 대해 들었을 때, 반월은 한동안 봄에는 그렇게 꽃이 많이 피냐고 배숙에게 물어보았다. 물론 그도 직접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그렇대,라고만 대답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꽃은커녕 제대로 된 나무도 없었다. 도적들과 폭동이 훑고 지나간 곳엔 앙상하게 뜯겨나간 나무들이 끝이었다. 봄이 와도 계절이 바뀌어도 늘 똑 같은 풍경일 것이다.
 반월이 그중에서도 관심 많은 건 벚꽃이었다. 연한 분홍빛의 조그마한 꽃이 온 나뭇가지를 다 뒤덮을 정도로 핀다는 것도, 바람이 불면 꽃잎이 하늘에 휘날린다는 것도 모두 그녀가 상상해본 적 없던 풍경이었다. 반월은 한동안 틈이 날 때면 화장군이 본 적 있는 벚꽃에 대해 물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며 아마 화장군이 살면서 본 벚꽃이란 벚꽃은 전부 얘기해줬을 거라고 배숙은 생각했다. 
만약 이곳을 자유롭게 나갈 수 있다면 그는 반월에게 다음에 보러가자고 직접 얘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배숙은 그저 묵묵히 반월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뺨을 스치는 바람과 함께 새하얀 꽃잎이 눈 앞에 일렁였다. 잠깐 멍하니 있었던 배숙은 정신을 차리고 날아가는 꽃잎을 바라보았다. 한 번 바람이 불 때면 눈보라 치듯 하얀 꽃잎들이 바람 방향을 따라 휘날리며 주위를 뒤덮었다. 반월은 그의 옆에 서서 꽃잎이 날아가는 방향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그러다가 발꿈치를 올리고 손이 닿는 나뭇가지로 팔을 뻗었다. 반월은 한동안 꽃들을 바라보다가 꽃잎이 제일 반듯한 꽃 몇 송이를 따서 배숙이 들고 있는 바구니에 넣었다.
 “배숙 오빠, 정말로 꽃을 먹을 수 있어?” 
 “응.”
 먹을 수 있단 점이 신기했는지 반월은 몇 번이고 바구니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벚꽃 향기를 맡았다.
 “화전이란 건 맛있어?”
 “나도 잘 모르겠어.” 
 사실 배숙도 화전에 대해 잘 몰랐다. 언젠가 스치듯 들어본 게 끝이었고 실제로 볼 일은 없었다. 특히 벚꽃도 화전으로 먹기도 한다는 건 그도 처음 안 사실이었다. 봄이 되면 우사네 마을 사람들은 봄에 해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먹으며 소소하게 잔치를 열었다. 화전에 필요한 벚꽃을 갖고 와달라고 우사가 부탁하지 않았다면 아마 둘 다 화전에 대해 쭉 모른 채로 지나갔을 것이다. 
 천천히 걸어다니며 벚꽃을 땄지만 어느새 바구니에 벚꽃이 한가득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다음 배숙은 몸을 돌려 왔던 산길을 내려갔다. 반월은 그의 뒤를 쫓다가 한 두걸음 앞서서 사방으로 휘날리는 벚꽃을 구경했다. 산이긴 했지만 마을 근처라 사람들이 많이 다닌 모양인지 누군가 평탄한 길을 터놓았다. 길 양 옆으로 벚꽃나무들이 일렬로 세워져 있어 누군가 일부로 이런 모양이 되게끔 심은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그는 한 두걸음 앞에 있는 반월을 바라보았다. 떨어진 꽃잎이 몇 번이고 겹쳐져 새하얀 길 위에 검은 머리를 풀어헤친 소녀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허공에 휘날리는 꽃잎에 가볍게 손을 휘젓는 모습도 비처럼 내리는 벚꽃 사이로 언뜻 보였다. 언젠가 꽃이 궁금하다며 아무 것도 없던 하늘을 바라보던 때가 떠올랐다.
 “배숙 오빠.”
반월이 그의 소매 끝을 얕게 잡아 끌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배숙은 가리킨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 끝엔 유독 큰 벚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주위에 있는 나무들 사이에 홀로 우뚝 솟아 있었다. 다른 것들에 비해 더 나이가 많아 보였다. 주위에 나무들이 없던 시절에도 이 나무만 홀로 서있었을 것 같았다. 반월이 가리킨 건 제일 위에 있는 가지 하나였다. 곧게 뻗은 가지의 끝이 새하얀 벚꽃으로 뒤덮인 모습이 멀리서 보아도 유독 눈에 띄게 아름다웠다.
 “하나 정도는 가져가도 괜찮지 않을까?”
 반월의 얼굴은 언제나 보았던 덤덤한 표정이었지만 왠지모르게 눈빛이 더 빛나는 것 같았다. 배숙은 잠깐 고민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직접 오를 걸 생각하며 나무가 얼마나 높은지 가늠해 보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 이미 반월은 나무를 직접 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반월이 나무를 오르다가 떨어질리는 없고 떨어진다고 해서 다칠 일도 없다. 하지만 굵은 가지를 붙잡고 디디는 팔 다리가 더 가늘고 왜소해 보여서 배숙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반월은 어느새 나무 끝까지 올라가 자신이 원했던 꽃가지를 꺾었다. 밑에 있는 배숙에겐 반월이 어떤 표정인지 보이지 않았지만 꽃가지를 소중하게 품에 쥐고 있는 것 같았다. 반월은 앉아있던 나뭇가지에서 천천히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오르는 것까진 괜찮았지만 직접 내려가기엔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다. 배숙은 그녀를 바라보면서 몇 걸음 움직였다. 바로 밑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멈춰서 반월을 불렀다.
 “받아줄게.” 
 바구니는 옆에 내려 놓고 팔을 뻗은 채 그는 반월을 계속 바라보았다. 사실 반월이라면 이런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건 쉬운 일이다. 배숙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오면 언제나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바람이 불자 그녀의 주위에 있는 벚꽃들이 모두 흔들렸다. 꼭 꽃으로 이루어진 숲이 한 번에 휘날리는 것같았다. 새하얀 꽃잎들이 흩날릴 때 그 사이로 검은 머리가 휘날려 반월이 더 눈에 띄었다. 배숙은 잠시동안 꽃잎 가득한 허공 속에서 떨어지는 반월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 순간 팔과 어깨에 묵직한 무게감과 누군가를 안았다는 감각이 전해졌다. 배숙은 놓치지 않기 위해 반사적으로 더 깊게 끌어안았다. 
 반월은 꽃가지를 들고 있는 쪽은 팔을 뻗어 배숙과 부딪히지 않게 했다. 다른 손으론 그의 팔을 붙잡았다. 배숙은 허리를 숙여 천천히 반월을 내려주었다. 땅에 발이 닿았을 때 반월은 여전히 한 손으론 그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다른 쪽 손은 배숙의 얼굴 옆으로 뻗어 꽃가지의 끝부분이 그에게 닿았다. 활짝 핀 벚꽃이 그의 머리부터 뺨, 어깨를 얕게 스쳤다. 언뜻 보면 벚꽃은 그에게서 피어난 것처럼 보였다.
 “어울리는 것 같아.”
 얕게 미소지은 듯한 입가가 보였다. 배숙은 문득 전에도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군에게 벚꽃 이야기를 묻고 며칠이 지났을 때 즈음, 하루는 반월이 바닥에 웅크려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어디선가 낡은 종이 하나를 구해와 몇 번이고 손으로 찢고 있었다. 뭘 하고 있는건지 감이 안 잡혔지만 배숙은 옆에 앉아 묵묵히 반월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 반월은 작게 찢은 종이들을 양 손에 모아 놓고 배숙에게 보여줬다.
 화장군이 꽃잎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줬어.
 반월이 종이를 찢고 끝부분을 뭉툭하게 접은 꽃잎은 언뜻 보면 진짜같기도 했다. 하지만 자세히보면 울퉁불퉁한 부분과 낡고 너저분한 부분이 보였다. 배숙은 말없이 종이 꽃잎을 보고 있을 때 반월이 갑자기 손을 그의 머리 위로 올렸다. 
 양손을 펴자 작은 종이들이 천천히 하늘하늘 흩날렸다. 그 종이 꽃잎들은 배숙의 뺨을 스치고 어깨에 닿았다. 반월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얕게 미소지었다.
 어울리는 것 같아.

 “배숙 오빠?”
 반월이 고개를 기웃거리며 그를 불렀다. 배숙은 반월을 내려주던 자세 그대로 시선이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한 손으론 반월의 등을 받쳐주고 있었고 허리도 살짝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춘 채였다. 반월도 여전히 그의 한 쪽 팔을 잡고 있었고 꽃가지를 그의 얼굴 옆에 둔 채였다. 배숙의 뺨 언저리에 닿은 꽃잎의 감각이 연하게 전해졌고 은은한 꽃향이가 맴돌았다.
 반월과 얼굴이 너무 가깝다는 걸 깨닫고 배숙은 천천히 손을 내리고 제자리에 바로 섰다. 반월도 그의 팔을 잡던 손을 풀고 꽃가지를 든 팔을 천천히 내렸다. 
 왠지 모르게 뺨에 열이 오른 것 같단 생각이 들어 그는 고개를 돌리고 바닥에 내려놨던 바구니를 들었다. 
 “이제 돌아가자.”
 “응.”
 반월은 꽃가지를 양 팔로 안은 채 그의 옆에 섰다. 배숙은 은은히 맴도는 열기를 신경쓰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몇 번 손으로 뺨을 쓸어내리며 걸었다. 문득문득 바로 옆에 나란히 걷고 있는 반월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품 안에 안고 있는 꽃가지는 그녀의 어깨부터 손목까지 전부 닿을 정도의 길이 였다. 검은 옷이어서인지 어깨부터 팔을 따라 벚꽃이 수놓아진 게 눈에 띄었다.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그 말이 나오진 않았다.
 그렇게 한 명은 벚꽃 바구니를 들고 한 명은 꽃가지를 든 채로 꽃잎이 휘날리는 소리 뿐인 조용한 산길을 내려갔다.


*
 마을에 도착했을 땐 사람들이 여러 종류의 꽃들을 따서 바구니에 모아둔 게 보였다. 다들 날이 좋다며 바깥에 모여 전을 부치면서 떠들었지만 배숙은 사람들과 소란스럽게 떠드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고 반월도 그가 가는 곳만 따라갔다. 
배숙은 두 사람 몫 정도의 꽃을 담아 우사네 주방으로 갔다. 능숙하게 그릇과 전을 부칠 물건들을 꺼내고 필요한 음식들을 옆에 가지런히 정리했다. 이곳에 온 후로 주방에서 요리하는 건 주로 그의 몫이었다. 반월은 옆에서 요리를 구경하다가 그가 부탁하는 것들을 도와주곤 했다. 같이 반죽을 빚고 그 위에 꽃을 올려주는 걸 도와줬다. 배숙이 전을 부치는 동안은 신기하단 듯이 눈을 떼지 못했다.
 “반죽에 뱀 같은 것도 올리면 부쳐먹을 수 있어?”
 “아마 안되지 않을까…”
 소소한 말을 주고받으며 화전을 전부 부치고 접시에 정성스레 담았다. 한 입씩 먹는 동안 배숙은 자기도 모르게 반월이 잘 먹고 있는지 시선이 갔다. 잘 부처진 화전은 조용히 그녀의 접시에 올려놓기도 했다. 반월은 직접 표정을 드러내거나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처음 먹어보는 화전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화장군도 좋아할까?”
 반월의 말에 배숙은 왠지 모르게 그도 화전을 먹어본적 없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재료는 많이 남아있었다. 처음 만든 화전을 다 먹은 다음 둘은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두 번째로 만든 것들은 가져갈 수 있게끔 상자에 넣어 포장했다. 화장군을 뵈러 간다고 말하자 우사는 마을의 특산품 몇 가지를 더 얹어 주었다. 
 
 문을 열고 지나갈 때 아까 갖고 온 꽃가지가 눈에 띄었다. 하얀 꽃병에 꽂아둬 어딘가 운치 있었고 문 근처에 둬서 주위를 오갈 때면 시선이 갔다. 
혹여 마을 사람들과 우사대인께서 싫어하진 않을까. 꽃가지를 갖고 왔을 때 배숙은 내심 걱정했었다. 하지만 우사는 반월이 들고 있는 꽃가지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병에 넣어 장식해두면 좋을 것 같다고 의견을 냈다. 반월은 꽃병을 고르고 어디에 둘지 한동안 고민하다가 이내 문 옆에 두고 만족스럽단 눈빛이었다. 그 모습이 배숙은 이유 없이 계속 기억 남았다.
 반월은 꽃가지를 잠깐동안 바라보다가 바깥으로 나갔다. 둘은 자연스레 아까 갔던 꽃길로 향했다. 은은하게 노을 지는 하늘로 오후때처럼 꽃잎이 눈보라 치듯 휘날리고 있었다. 배숙은 가져다줄 물건들을 든 채로 한 걸음 뒤에서 반월을 바라보며 걸었다. 문득 허공을 맴돌던 꽃잎이 그녀의 머리와 어깨에 묻은 게 보였다. 팔을 뻗어 조심스레 어깨에 있는 꽃잎을 정리해주려 할 때 반월이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배숙 오빠도 꽃구경 좋아해?”
 그는 반월의 어깨에 닿으려했던 손을 천천히 내리고 잠시동안 고민했다. 지금까지 꽃을 좋아하는지 어떤지 생각해본적은 없었다. 특별히 싫다고 느낀적은 없어서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럼 전에 봤던 곳들도 다 여기만큼 경치가 좋아?”
 그녀의 목소리에서 다른 장소는 어떤 모습일지 호기심이 전해졌다. 반월의 말에 배숙은 이전에 지나쳐왔던 봄을 기억해보려 했다. 반월국에서 나온 후로 몇 번이고 수많은 봄이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전의 풍경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꽃을 제대로 본 적이 있기는 했던가, 한동안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여유롭게 경치를 본 적이 없었단 결론만 나왔다. 
 “이곳이 제일 좋아.”
 배숙은 아까보다 더 노을이 짙어진 하늘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반월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주위로 꽃잎이 떨어지고 있었고 반월이 지나갈 때면 그 사이로 활짝 핀 벚꽃이 보였다. 그래서 지금이 제일 좋다고 생각하며 배숙은 함께 꽃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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